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사도행전 2:42)
스마트폰이 세상을 바꾸기 전, 코닥(Kodak)은 세계 최강의 카메라 회사였습니다. 필름 시장의 80%를 장악했고, 전 세계 수만 명의 직원을 거느렸으며, '코닥 모먼트'라는 말이 일상어가 될 만큼 사람들의 삶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최초의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한 곳이 바로 코닥이었습니다. 1975년, 코닥의 엔지니어 스티브 새슨이 그 카메라를 들고 경영진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훌륭하군. 그런데 이건 절대 밖에 내놓으면 안 되네." 필름이 팔리지 않을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 후, 코닥은 파산했습니다. 변화가 두려워 모험을 거부한 대가였습니다.
반대편 극단에도 비극은 있습니다. 2000년대 초, '새로운 것이면 무조건 옳다'는 신념 아래 수많은 닷컴 기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사업 모델도, 수익 구조도, 고객도 없었지만 '디지털'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수천억 원의 투자를 받았습니다.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2001년 닷컴 버블이 붕괴되며 수백 개의 기업이 한꺼번에 사라졌습니다. 뿌리 없는 변화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방향 없는 모험은 결국 추락입니다.
어느 사회이든, 어느 조직이든, 그 내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 하나 있다. 정통(正統)과 전통(傳統)의 싸움입니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두 단어는 사실 전혀 다른 무게를 지닙니다. 정통은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달라져도 변할 수 없는 진리와 가치입니다. 반면 전통은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내려오며 그 나름의 의미를 획득한 관습과 형식입니다. 전통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옳지 않아도 오래되면 전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충돌할 때, 공동체는 갈림길에 섭니다.
한쪽 극단에는 수구주의가 있습니다. "예전부터 이렇게 해왔으니 이것이 옳다"는 논리입니다. 예배 순서 하나, 찬송가 선택 하나도 바꾸면 안 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지키려는 것이 정통인지, 아니면 그저 익숙함인지를 묻지 않습니다. 정통과 전통을 혼동할 때, 오래된 껍데기가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맙니다.
반대편 극단에는 변화지상주의가 있습니다. "오래된 것은 무조건 낡았다"는 논리입니다. 교회를 카페처럼 꾸미고, 설교를 유튜브 콘텐츠처럼 편집하고, 예배를 콘서트처럼 연출하면 젊은이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변화 자체가 목적이 될 때, 무엇을 위한 변화인지를 잃어버립니다. 형식은 바뀌었는데 생명은 없는, 껍데기만 새로운 교회가 됩니다.
미국의 미래교회학자 레너드 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너무 전통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전통적이지 못하다는 데 있다." 처음 들으면 역설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전통'은 껍데기 전통이 아닙니다. 전통 안에 살아 숨 쉬는 정통, 말씀과 성령의 뜨거운 심장 소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겉모습의 전통은 너무 많이 붙잡고 있으면서, 정작 그 안에 담겨야 할 정통의 생명을 잃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것을 '죽은 정통'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장로들의 유전(전통)을 더 권위 있게 여겼던 것처럼, 성령의 역사는 사라지고 편안한 만족감과 종교적 자부심만 남은 상태, 뜨거움은 없고 형식만 남은 신앙, 그것이 죽은 정통입니다. 말은 정통이지만, 실상은 전통의 무게에 눌려 정통이 질식한 상태입니다.
한국 교회 초기,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운동은 엄청난 '모험'이었습니다. 공개 회개, 통성기도, 뜨거운 성령의 역사, 당시로선 낯설고 두려운 형식들이었습니다. 누군가는 그것이 전통에 어긋난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험이 한국 교회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정통으로 전통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미국의 한 교회 문 앞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모든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고 들어오십시오." 신앙은 처음부터 모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도,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도 모두 엄청난 모험이었습니다. 모험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안전만을 추구한 신앙은 결국 아무것도 낳지 못합니다. 항해 중인 배가 허리케인을 만났을 때, 선원들은 닻을 뒤가 아니라 앞으로 던집니다. 닻을 앞 바다 밑에 고정시킨 뒤, 그 닻줄을 잡아당기며 조금씩 전진하는 것입니다. 바람이 없어 꼼짝할 수 없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던진 닻이 배를 끌어당깁니다.
사도행전이 바로 그 닻입니다. 말씀과 성령이 살아 역사했던 초대교회의 모습이 교회의 정통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말이 있었고, 헬라파와 히브리파의 갈등이 있었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혼란 속에서도 말씀과 성령을 붙잡고 전통을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닻은 뒤에 있지 않았습니다. 항상 앞을 향해 던져졌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생명 없는 전통을 절대시하며 천천히 소멸되어 갈 것인가, 아니면 정통의 닻을 앞으로 던지며 새로운 항해를 시작할 것인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통으로 전통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전통이 정통을 변화시킵니다. 코닥이 디지털을 외면했을 때, 시장이 코닥을 삼켜버린 것처럼, 껍데기 전통이 살아 있는 정통을 집어삼키기 전에, 우리는 닻을 앞으로 던져야 합니다. 모험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모험하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창의적으로 일하신다. - 유진 피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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