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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사는 삶

매임에서 풀림으로 - 예수님이 오신 이유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12.

2019년 봄, 서울의 한 대형 병원 응급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20대 후반의 청년 하나가 극심한 복통으로 실려 왔습니다. 의사가 즉각 처치를 시작하려는데, 보호자로 따라온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의사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선생님, 잠깐요. 오늘이 주일인데, 우리 교회 규칙상 주일에는 수술을 받으면 안 됩니다." 의사는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아들은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극단적인 예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런 이야기가 완전히 낯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쩌다 규칙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잃는 자리까지 오게 된 걸까요?

우리 삶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올무들이 있습니다. 어릴 때 받은 상처가 수십 년 뒤에도 관계를 망가뜨리고, 한 번의 실패가 평생의 자기 불신으로 굳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의 습관에 매여 있고, 어떤 사람은 두려움의 감옥 안에 갇혀 살아갑니다. 이런 매임들은 때로 폭력이나 질병처럼 눈에 보이는 형태를 띠기도 하고, 때로는 이념이나 세계관처럼 보이지 않는 형태로 사람을 옭아매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이 매임에서 우리를 풀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탄이 인간을 묶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죽음에 대한 공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죽음 자체를 정복하셨습니다. 죽음마저 우리를 붙잡아 둘 수 없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올무가 우리를 영원히 매어 둘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13장에는 조용하고도 강렬한 장면 하나가 등장합니다. 회당에서 예수님이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앞을 향해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시선이 군중 뒤편 어딘가에 멈추었습니다. 한 여인이 거기 있었습니다. 그녀는 18년째 허리를 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항상 고개를 숙이고, 땅만 바라보며, 사람들의 얼굴을 제대로 올려다보지 못한 채 살아온 18년이었습니다. 그 세월이 얼마나 길었는지, 예수님의 제자들이 태어나던 그 무렵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하루도 허리를 펴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저 배경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강의를 멈추고 그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누가복음 13:12) 그 순간 여인의 등이 펴졌습니다. 18년의 굴곡이 한 순간에 풀린 것입니다. 마귀가 여인을 묶어 두는 데는 18년이 걸렸지만, 예수님이 그 결박을 끊으시는 데는 18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 앞에서 기뻐한 사람보다 분노한 사람이 먼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회당장이었습니다. 그는 무리를 향해 외쳤습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누가복음 13:14) 그의 분노를 단순히 나쁜 사람의 이야기로 치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악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생 율법을 지키며 살아온, 당시 기준으로 보면 가장 신실한 종교 지도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분노한 것은 사익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지키는 체계가 옳다고 믿었기 때문에 분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번째 종류의 위선입니다. 윤리적으로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옳다고 집단적으로 믿음으로써 생겨나는 문화적 위선입니다.

이런 집단 문화적 위선은 1세기 유대 사회에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17세기 스코틀랜드에서는 한 엄격한 목사가 안식일에 기차를 타고 온 어머니의 아이에게 유아세례를 거절했습니다.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였습니다. 미국에 처음 건너간 청교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650년 코네티컷 뉴헤이븐에서 제정된 법에 따르면, 주일에 도둑질을 하면 첫 번째는 귀 하나를 베어 내고, 두 번째는 나머지 귀를 베어 내고, 세 번째는 사형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신앙의 선배들 중 일부도 이 제도를 진심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
'라는 질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안식일을 '' 지키는가, 라는 질문을 놓쳐 버리고, 오직 '어떻게' 지키는가만을 연구하다 보니, 사람보다 제도가 먼저인 세상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
'라는 질문을 얼마나 자주 던집니까? 어떤 회사에서 매주 월요일 아침 9시에 전 직원 보고 미팅이 열립니다. 아무도 이 미팅이 왜 열리는지 모릅니다. 10년 전 어느 팀장이 만든 관행인데, 그 팀장도 이미 퇴직했습니다. 미팅은 아무 결론 없이 한 시간씩 이어지고, 직원들은 그 시간 동안 처리할 수 있었던 고객 민원들을 뒤로 미룹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 미팅을 없애자고 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원래 하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 공동체도 다르지 않습니다. 왜 이 예배를 이 순서대로 드리는지, 왜 이 형식을 지키는지, '
'라는 질문 없이 '어떻게'만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제도가 사람보다 중요해지는 역전이 일어납니다. 회당장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여인이 18년의 매임에서 풀린 것보다, 안식일 제도가 손상된 것에 더 분노했습니다.

예수님도 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분노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도가 깨진 것에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이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여 있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타오르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인이 18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풀어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누가복음 13:16)

안식일은 원래 해방의 날이었습니다. 출애굽의 기억, 곧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자유케 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방의 날이, 오히려 사람을 옭아매는 날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견딜 수 없으셨습니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붙인 죄목은 '
안식일 파괴자'였습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은 안식일의 진정한 뜻을 회복하신 분이었습니다. 안식일 파괴자가 아니라 안식일 회복자이셨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 안에 회당장이 없습니까? 누군가 오래된 방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려 할 때, 우리의 첫 반응은 무엇입니까? 누군가 교회의 관행에 의문을 제기할 때, 우리는 그 질문 자체를 불경스럽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고통 중에 있는 이웃보다 교회의 규칙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지는 않습니까? 집단 문화적 위선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위선인지조차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회당장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며 분노했습니다. 그 확신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매기 위해서가 아니라 풀기 위해서였습니다. 제도가 사람을 섬기는 도구가 되어야지, 사람이 제도를 섬기는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모든 형식과 제도는 한 가지 목적을 향해야 합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을 찾아 사랑으로 자유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18년을 굽어 살던 여인이 허리를 펴던 그 순간, 그녀가 처음으로 본 것은 하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이 풀어 주신 것을, 우리가 다시 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매여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임재 안에서 매임을 풀고 있습니까?

진정한 개혁가는 어떤 패턴을 제시하지 않고 이미 그렇게 살고 있고 보여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