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12월이 되면 사람들은 카드를 주고받습니다. 반짝이는 별을 따라가는 동방박사들, 구유 앞에 무릎 꿇은 목자들, 짚 위에 누인 아기 예수, 따뜻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장면들입니다. 그런데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보낸 성탄 카드에 이런 그림이 그려져 있다면 어떨까요? 군인들이 집집마다 들이닥치고, 어머니들이 아기를 끌어안고 울부짖고, 아이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장면, 당신은 그 카드를 보내 사람에게 뭐라고 말할 것입니까? 그런데 사실, 그것이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헤롯은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오늘날로 치면 그는 완벽한 정치인처럼 보였습니다. 40년 장기 집권, 로마와의 외교 관계를 능수능란하게 유지했고, 유대교를 로마제국 안에서 공인된 종교로 만들어 냈습니다. 유대인들이 황제 숭배를 거부해도 눈감아 주도록 협상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화려하게 재건축하는 데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습니다. 숫자만 보면 그는 유대 역사상 손꼽히는 유능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왜인지 알 수 없는,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불쾌감, 왜였을까요? 헤롯은 카멜레온이었습니다. 유대인 앞에서는 유대인의 편이었고, 이방인 앞에서는 이방인의 편이었습니다. 성전을 지어 준 것도 사랑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왕좌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한 계산이었습니다. 그 모든 웃음과 선물과 정책 뒤에는 단 하나의 공포가 숨어 있었습니다. 내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인격 장애라고 부릅니다. 극심한 불안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는 완벽하게 보이려 하고, 그 불안을 건드리는 것이 나타나면 가차 없이 제거해 버리는 사람, 헤롯은 자신의 아들도, 아내도, 자신을 위협한다고 판단하면 죽였습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말이 있습니다. "헤롯의 아들이 되느니 차라리 그의 돼지가 되는 편이 낫다." 돼지는 유대인이 먹지 않으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나타났을 때 헤롯의 머릿속에서는 경보음이 울렸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그 한 문장이 헤롯의 심장을 멈추게 했습니다. 성경은 기록합니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더라." 왕 한 사람의 두려움이 도시 전체를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는 즉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 보고서를 제출하게 했습니다. 메시아가 어디서 태어나는가? 보고서는 미가 5장 2절을 인용해서 베들레헴이라고 돌아왔습니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을 불렀습니다. 목소리는 차분했습니다. 손짓은 정중했습니다. "아기를 찾으면 내게도 알려 다오. 나도 가서 경배하리라." 그러나 박사들이 문을 나서자 헤롯의 눈빛이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경배가 아니라 살인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박사들이 다른 길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헤롯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베들레헴과 그 인근 지역의 두 살 이하 남자아이를 모두 죽여라."
그날 베들레헴의 아침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빵 굽는 냄새가 거리에 퍼지고,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씻기고, 갓난쟁이들은 햇살 속에서 졸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기의 울음소리는 소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소리, 희망의 소리입니다. 그 울음소리들이 그날 하나씩 끊겨 나갔습니다. 군인들의 발소리, 문을 부수는 소리, 어머니들의 비명, 그리고 침묵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그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리고 그 시각, 헤롯의 궁전에서는 왕이 속으로 미소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위협이 제거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단단히 착각했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의 왕좌를 빼앗으러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기는 헤롯이 앉아 있는 왕좌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헤롯의 삶 이었습니다. 왕좌가 아니라 마음의 주인이 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경쟁자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경쟁자가 아니라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헤롯이 평생 두려워하고 지키려 했던 그 자리, 그 불안, 그 공허함을 채워 주러 오신 분이었습니다. 헤롯이 그 진실을 알았더라면, 그 아기 앞에 무릎을 꿇었더라면, 그의 크리스마스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를 멈추고 솔직한 질문을 하나 던져 보십시오. 헤롯은 2000년 전 사람입니다. 그러나 헤롯의 마음은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 예수님을 경쟁자로 느낍니다. 내 생활 방식, 내 계획, 내 자유, 내 편안함을 빼앗아 갈 존재로 느낍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고, 하고 싶은 것들을 못 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관리하려 합니다. 카드에 그려진 아기 예수는 환영하지만, 삶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은 불편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안의 헤롯입니다.
헤롯이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죽였듯, 우리 안의 헤롯은 마음속의 아기 예수를 제거하려 합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들뜬 분위기는 즐기면서, 정작 예수님이 내 삶에 들어오시는 것은 막습니다. 그것이 크리스마스를 '메리(merry) 크리스마스'에서 '메시(messy, 엉망진창인) 크리스마스'로 바꾸어 버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빼앗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주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우리가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의로움을, 우리가 평생 찾아 헤매는 진짜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주러 오셨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하는 날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날입니다.
헤롯은 아기 예수를 지워 버리면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비극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안전과 평화는, 바로 그 아기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올해 크리스마스, 우리는 어떤 카드를 받을 것입니까? 아니,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그 아기를 맞이할 것입니까?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 마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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