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폰이 꺼진 순간을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충전기를 꽂아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어 있는 그 순간, 지도도 없고, 알람도 없고, 연락도 안 됩니다. 처음 몇 분은 당황스럽고 불안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고요함이 찾아옵니다. 새소리가 들리고, 하늘이 보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옵니다. 빛이 꺼졌을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도 그런 것인지 모릅니다.
16세기 스페인의 한 수도사 이야기입니다. 본래 이름은 성 마티아의 요한이었지만, 그는 스스로 이름을 '십자가의 요한'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의 이름에 새겨 넣을 만큼, 그는 철저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는 당시 부패한 수도원을 개혁하는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개혁이란 언제나 기득권의 저항을 불러옵니다. 1577년 10월, 반대파 수도사들이 그를 납치했습니다. 톨레도 수도원의 독방, 창문도 없는 좁은 공간에 11개월을 갇혀 지냈습니다. 그가 볼 수 있는 빛이라고는 벽 틈으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오는 가느다란 한 줄기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어둠 속에서 글을 썼습니다. 그 글에는 놀랍게도 자신이 얼마나 억울하고 고통스러웠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대신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두운 밤을 통해 한 영혼을 어떻게 당신 가까이 데려가시는가?" 그는 그 책에 "영혼의 어두운 밤"이란 제목을 붙였습니다.
솔직히 말해 우리 대부분은 믿음의 밝은 면만 원합니다. 기도하면 응답받고, 예배드리면 은혜 받고, 헌신하면 축복받는 그 회로입니다. 어려움이 오면 빨리 해결되고, 기도하면 상황이 반전되고, 결국 다 잘 되는 그 스토리입니다. 미국의 설교자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는 이것을 '전적 태양 영성'이라고 불렀습니다. 믿음의 빛나는 면만 받아들이고, 어두운 면은 아예 없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니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말씀을 근거로, 어두운 밤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기를 읽으면 이 논리가 무너집니다. 욥은 하나님이 직접 "내 종 욥을 보라"고 자랑하실 만큼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재난이 덮쳤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건강을 잃었습니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은 "네가 뭔가 잘못한 게 있겠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이것이 영혼의 어두운 밤입니다. 잘못해서 받는 벌이 아니라, 더 깊은 곳으로 부르심을 받는 좁은 통로입니다.
요즘 도시에서 별을 보기 어렵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빛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네온사인, 가로등, 건물 조명, 그 빛들이 밤하늘을 덮어버립니다. 별은 사라진 게 아닙니다. 여전히 거기 있습니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어둠이 있어야 별이 보입니다. 수면 전문가들은 진짜 어둠이 없으면 사람은 제대로 쉬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스마트폰의 블루라이트, 침실의 작은 불빛 하나도 수면의 질을 떨어뜨립니다. 어둠은 인간의 회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둠이 부족하면 빛 때문에 병에 걸립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두운 밤은 우리를 멈추게 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사실은 중요합니다. 낮 동안 우리는 스스로 무언가를 한다고 착각합니다. 계획하고, 실행하고, 통제하고, 그러다 보면 자신이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어둠이 찾아오면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수동적인 존재인지 드러납니다. 우리가 잠든 그 밤 시간에도 심장은 뛰고, 세포는 회복되고, 지구는 돌아갑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세상이 가장 본질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하루의 시작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아침이 먼저가 아니라 저녁이 먼저입니다. 어둠이 먼저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밤새 이루어 놓으신 일을 따라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욥기 마지막 장에서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주께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고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 이루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일들을 말하고, 너무 기이해서 알 수 없는 일들을 내가 내뱉었습니다."(욥기 42:2~3) 고난이 끝나서 이렇게 말한 게 아닙니다. 고난을 통과하면서 무언가를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 그리고 자신의 깊은 무지함, 영혼의 어두운 밤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은 신학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분을 신뢰하는 법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능동적으로 힘써도 이루지 못하는 성화가, 우리가 완전히 수동의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가장 약할 때, 하나님이 가장 깊이 일하십니다.
지금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다면, 아마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것일 것입니다. 빨리 이 밤이 지나갔으면... 당연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요한이 감옥에서 배운 것은, 어두운 밤을 빨리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걸으면서, 어둠 속에서도 보실 수 있는 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감옥 독방의 벽 틈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빛,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빛을 붙들고, 그 빛 안에서 그는 시를 썼습니다. 그 시는 수백 년이 지난 오늘도, 어두운 밤을 걷는 사람들의 손에 쥐어지고 있습니다. 어둠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시간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됩니다.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빈곤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기도의 빈곤이다. - 조지 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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