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겨울, 탈북 청년 김혁(가명)은 서울의 한 작은 교회 청년부 모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목소리가 자꾸 떨렸습니다. 두만강을 건너던 날 밤, 함께 강을 건너던 열두 살짜리 남동생이 차가운 물살에 휩쓸려 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손을 놓아야 했습니다. 손을 잡고 있으면 둘 다 죽었을 테니까, 그는 혼자 강을 건넜습니다. 그 뒤로 남동생의 이름을 부르는 꿈을 수백 번 꾸었다고 했습니다. 모임에 앉아 있던 청년들은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습니다. 누군가는 인스타그램을 확인했고, 누군가는 유튜브를 켰습니다. 김혁의 이야기는 그렇게 그 방 안에서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 어느 곳의 소식이든 실시간으로 받아볼 수 있는 시대이지만, 바로 휴전선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놀라울 만큼 무감각합니다. 통계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200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북한 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생각한 유권자는 전체의 3%에 불과했습니다. 14호 정치범 수용소를 탈출하여 미국에서 북한 인권 운동을 벌이고 있는 신동혁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한에서 북한에 진정 관심이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0.001%밖에 안 되어 보입니다. 생각해 보았자 아무런 이득이 없지요." 이득, 그 한 단어가 우리 시대의 민낯을 드러냅니다.
성경에는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짓밟히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성전은 불탔고,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으며, 거리에는 굶어 죽는 아이들이 넘쳐났습니다. 그 참상 앞에서 예레미야는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너진 성벽 옆에 앉아 울었습니다. 그 울음이 바로 예레미야애가입니다.
오늘 한반도의 영적 지형은 그 시대와 묘하게 겹칩니다. 남한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 자유와 번영을 누리면서도 그 풍요 안에 천천히 잠들어 가고 있습니다. 반면 북한은 상상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 갇혀 있다. 2,400만 명의 동포가 폐쇄된 권력 아래 인권을 유린당하고, 굶주리고, 처형당합니다. 탈북자들의 수기를 읽다 보면 인간이 인간에게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마주하게 됩니다. 전기 철책선, 공개 처형, 강제 북송, 수용소, 이 단어들은 뉴스 속 활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마음으로 이 시대를 바라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 번째는, 하나님이 여전히 북한을 다스리신다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폐허 속에서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통치하시며 주의 보좌는 자손 대대로 지속됩니다"(예레미야애가 5:19). 바벨론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함락을 자신들의 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긴 증거라고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다른 답을 내놓았습니다. 거대하던 바벨론 제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스라엘은 돌아왔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의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형되기 직전 간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이 끝이지만, 나에게는 삶의 시작입니다." 권력이 아무리 강해도 역사의 주인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북한에서 교회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북한을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땅 아래에서 자라는 씨앗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어둠 속에서도 자라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북한을 이 상태로 영원히 버려두지 않으실 것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고, 왜 우리를 이토록 오랫동안 버려두십니까?"(예레미야애가 5:20). 이것은 절망의 독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결코 그럴 분이 아니라는 확신 위에서 드리는 간구입니다.
한국전쟁 정전 이후 70년이 넘었습니다. 분단의 세월이 길어질수록 통일의 가능성은 요원해 보입니다. 통일 비용에 대한 현실적 부담도 큽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남한이 북한을 흡수 통일할 경우 서독이 동독을 통일할 때보다 2.5배 이상의 비용이 들고, 30년간 2조 달러 이상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숫자 앞에서 많은 이들이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통일이 안 됐으면 좋겠다." 그 솔직함을 탓하기 전에, 우리는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불과 일 년 전, 그것을 예측한 전문가가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역사의 전환점은 항상 예고 없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인간의 경제 분석표와 다릅니다.
세 번째는, 북한 땅에 옛 신앙이 다시 회복되기를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켜서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우리의 날들을 옛날처럼 새롭게 하소서"(예레미야애가 5:21). '옛날'을 기억한다는 것은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평양은 한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습니다. 1907년, 그 도시에서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회중 앞에서 고백하며 울었고, 그 울음이 도시 전체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를 택한 신앙인들이 그 도시에서 나왔습니다. 공산당의 박해 아래서도 지하 교회는 살아남았습니다. 그 씨앗이 완전히 죽었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성경을 읽고 있을 것입니다. 발각되면 수용소에 끌려가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 믿음의 불씨를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어두운 방에서 가장 작은 빛도 꺼지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밤이 가장 깊어지는 순간은 새벽이 가장 가까이 온 순간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로마서를 쓴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했습니다(롬 9:3). 그것은 과장이 아니라 기도였습니다. 우리도 그 기도를 물려받은 사람들입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아 보십시오. 지금 이 순간, 두만강 어딘가에서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눈물로 끝나지 않도록, 예레미야처럼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길 바랍니다.
우리는 잘해서 하나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잘못해서 하나님께 간다. - 리처드 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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