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태복음 20:16)
어느 시골 교회에 집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삼십 년을 한 교회에서 충성스럽게 섬긴 분이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빠진 날이 손에 꼽힐 정도였고, 헌금도 항상 맨 앞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교회에 늦깎이로 등록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겨우 이삼 년을 다녔을 뿐인데, 그 청년이 먼저 임직을 받고 교회 리더십을 맡게 되었습니다. 집사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날 이후로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가끔 그분이 지인에게 털어놓은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삼십 년을 바쳤는데, 그 청년은 고작 이 년이잖소." 이 이야기는 특별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19장 끝자락에는 베드로의 질문이 하나 등장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부자 청년과 나누었던 대화가 끝난 직후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말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을 읽으며 우리는 잠시 베드로의 얼굴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분명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꾸밈없이, 자신이 속으로 계산하고 있던 것을 솔직하게 꺼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만큼 헌신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 합당한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질문 안에는 희생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기대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심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심리를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씀이 불편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 안에도 베드로와 똑같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곧바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이어 가셨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포도원에 고용된 일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아침 아홉 시에도, 낮 열두 시에도, 오후 세 시에도 시장에 나가 일꾼들을 더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해가 기울어질 무렵인 오후 다섯 시에도 여전히 일거리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그들마저 포도원으로 불렀습니다.
저녁이 되어 품삯을 나눠 줄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인은 나중에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모두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지불했습니다. 그러자 아침 일찍부터 뙤약볕 아래 일한 사람들이 들고 일어섰습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땡볕에서 일했는데,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품삯을 받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지극히 합리적인 항의였습니다. 경제 원리로 보면 당연한 불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있소? 우리가 한 데나리온으로 약속하지 않았소?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단 말이오? 내가 선하므로 당신이 악하게 보는 것이오?"
이 비유는 노동법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회적 정의에 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핵심은 주인의 마지막 말에 있습니다. "내가 선하므로." 하루 종일 일한 일꾼의 불평은 주인이 악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이 지나치도록 선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먼저 된 자'로 규정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성전에서 기도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금식을 했습니다.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쌓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리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시고, 창녀로 알려진 여인을 용서하시고, 나병환자의 손을 잡으시자 그들의 마음속에 불평이 일어났습니다. "저분이 죄인의 친구라 하는구나."
바리새인의 비극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지 못한 데 있었습니다. 자신의 공로가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루 종일 일한 일꾼이 오후 다섯 시에 들어온 일꾼에게 분노하느라 주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경건에 눈이 가려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없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먼저 된 자'라는 단어는 단순히 순서상 첫 번째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고결한 자', '우월한 자'라는 뉘앙스도 담겨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스스로를 '먼저 된 자'라 여겼던 것은 단순한 순서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우월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우월감이 결국 그들을 '나중 된 자'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 비유의 역설을 이해하려면 한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후 다섯 시에 시장에 서 있던 그 사람들은 왜 거기 있었습니까? 비유 속 주인이 물었을 때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우리를 고용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게으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불림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시선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 중 누가 이른 아침부터 신실하게 하나님을 찾은 자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우리 대부분은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해 방황하다가, 어쩌다 하나님을 만나 포도원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내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을 알 때, 한 데나리온은 분노의 이유가 아니라 감격의 이유가 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코리 텐 붐은 전쟁이 끝난 후 전국을 다니며 용서와 화해를 전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의 강연이 끝난 후 한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그녀와 그녀의 언니를 잔인하게 다루었던 간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용서를 구하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코리 텐 붐은 순간 얼어붙었습니다. 언니가 그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그 손을 잡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손을 뻗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 손을 잡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잡아 주십시오.' 그때 내 손이 움직였고, 그 손을 잡았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가 되는 순간이란 이런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과 공로를 계산하기를 멈추고, 하나님의 선하심이 자신을 통해 흐르도록 내어 드리는 순간입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깊은 위기 속에 있습니다. 그 위기의 이면에는 여러 구조적 문제가 있지만, 그 뿌리에는 '먼저 된 자'라는 의식이 깊이 박혀 있는 리더십의 문제가 있습니다. 오래 섬겼으니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공로 의식, 더 많이 헌신했으니 더 많이 누려야 한다는 보상 의식, 우리 교회가 먼저이고 저 교회는 나중이라는 우월 의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선명하게 말합니다. 포도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일했는가가 아니라, 주인의 선하심을 아는가입니다. 아침 일찍 일한 일꾼이 불평한 것은 주인이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이 너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릴 때, 우리는 비로소 보상을 셈하기를 멈춥니다. 내가 오래 믿었음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을 포도원으로 불러 주셨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 감사가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포도원에 불러 주셨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한 데나리온인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가장 적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만큼 꼭 그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한다. - 크라우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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