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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이야기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0.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그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8:9)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가난”이라는 단어가 적절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가난은 단순히 물질의 결핍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가난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은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신 존재적 가난이었습니다. 부요하신 분이 스스로 가난을 택하신 이유, 그것은 오직 “너희를 위하여”였습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부요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시며, 영광과 존귀로 충만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늘의 보좌에서 천사들의 찬송을 받으시던 분, 모든 만물의 주인이셨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 부요함을 잠시 내려놓으셨습니다. 말구유에 태어나셨고, 인간의 몸을 입으셨으며, 결국 십자가의 수치와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왕의 옷을 벗고, 종의 옷을 입으셨습니다. 그분의 낮아짐은 우연이나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 사랑의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것을 버리심으로, 잃은 자를 얻고, 죽은 자를 살리고,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분의 낮아짐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여신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깊은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서로의 처지 안으로 들어가는 공감이 필요합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의 삶을 이해하려면, 그 부요함의 일부를 내려놓고 그 곤핍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나눔과 교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이 하늘의 영광을 그대로 지니고 계셨다면, 죄와 사망의 그늘 아래 있는 우리와 결코 하나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죄의 결과로 고통받는 인간의 자리, 수치와 눈물, 배신과 외로움이 있는 그 자리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고, 인간의 고통을 느끼셨으며, 인간의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끊어진 다리를, 십자가 위에서 그분의 몸으로 놓으셨습니다. 그분의 가난은 단지 물질의 가난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한 영적 가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가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분의 부요함이 우리에게 전해져야 했고, 우리의 가난함이 그분께로 옮겨져야 했습니다. 그분은 의로우신 분이셨지만, 우리의 불의함을 짊어지셨습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분이셨지만, 우리의 죄와 더러움을 대신 입으셨습니다. 그분은 영생이신 분이셨지만,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교환, 이 거룩한 전가(轉嫁)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고,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 우리는 하늘의 기업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영광의 옷을 벗고,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피로 우리를 씻기셨기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의 참된 의미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단순히 말로만 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 자신의 의, 자신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단순히 동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분의 가난은 단순히 희생이 아니라, 사랑의 언어였습니다. 그분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싶다”는 말씀을, 십자가라는 가장 깊은 낮아짐 속에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주님의 이 사랑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부요함(은혜, 시간, 사랑, 재능)을 나누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말로만 고백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은 단지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부요를 나누어 주신 실재적 사건이며, 그 사랑에 응답하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초청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었으니, 이제 너도 나의 부요함을 나누라.” 우리가 받은 은혜를 나눌 때,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 움직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과의 참된 교제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분이 낮아지셨기에 우리가 높아졌고, 그분이 버리셨기에 우리가 얻었으며, 그분이 죽으셨기에 우리가 살았습니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부요하게 하려고 가난하게 되었다.”

이 사랑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이 우리의 부요함이기 때문입니다
.“오 놀라운 사랑이여, 주의 가난함이 나의 부요함이 되었나이다. 이제 내 생명은 주의 은혜로 풍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