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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15.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창세기 20:6,16)

약속의 후손 이삭이 태어나기 직전, 성경은 우리에게 당혹스러운 장면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또다시 자신의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넘기는 파렴치한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토록 영광스러운 순간 바로 앞에 이런 수치스러운 에피소드를 기록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대단해서, 그가 자격이 있어서 약속의 후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신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은혜로 약속을 성취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창세기 20장을 읽다 보면 묘한 역전 현상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방 왕 아비멜렉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고 의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자마자 즉시 순종했고, 자신의 결백을 당당히 말할 수 있었으며, 오히려 아브라함을 향해
"당신은 합당치 않은 일을 했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조차 그의 온전한 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소돔을 멸하시는 하나님을 직접 만났고, 그분의 약속을 받았으며, 불로 심판받는 도시를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세상 왕이 두려워 자신의 아내를 팔아넘겼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브라함의 편을 드셨습니다. 아비멜렉을 위협하시고, 결국 아비멜렉의 재물과 가축과 땅까지 빼앗아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너무 편파적이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선'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아비멜렉은 사라에게 말합니다.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선'은 세상이 말하는 도덕적 우월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선'입니다.

시편 135편을 보면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다." 그런데 그 선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시고, 많은 왕들을 치시고, 그들의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어떻게 이것이 '선'일 수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은 당신의 언약을 따라 당신의 백성을 건지시고, 당신이 계획하신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그 모든 일은 당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거기에는 인간의 자격이나 노력이 손톱만큼도 개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에게는 뭇 나라가 두레박의 한 방울 물이나 저울 위의 티끌 같을 뿐이다. 그분 앞에서는 모든 민족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피조물은 티끌입니다. 우리도 본래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티끌이 아닌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찌 이스라엘만 아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백성에게만 관심을 두셨기에 그들만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로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주님께서는 야곱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하셨다. 이스라엘에게서 어떤 잘못도 발견하지 못하셨다." 약속의 후손을 낳을 아브라함이 바로 이러한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놀라운 은혜를 입은 아브라함은 어떤 실수를 저질렀을까요?

첫째, 그는 제단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만났던 곳, 약속을 받았던 장소, 은혜의 제단이 있던 헤브론 마므레를 떠나 남방으로 이사했습니다. 남방은 애굽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그는 더 안전하고 풍요로운 '거처하기 좋은 땅' 그랄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하나님의 치열한 열심 앞에서, 우리가 예배와 사귐의 자리를 떠나 세상의 풍요를 좇는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선한 계획 속에 있는 성도는 제단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그는 사람이 두려워졌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내 아내를 빼앗으려고 나를 죽일 것입니다." 소돔을 멸하시는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이, 지금까지 자신을 이끌어오신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 세상 왕의 칼을 더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 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어떤 것 앞에서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가난, 질병, 권력, 폭력 그 무엇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그분이 나의 인생을 당신을 위해 선으로 이끄시는 길에 생긴 어려움이라면, 그것은 내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나의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의 풍요에 관심을 두고 남방으로 이사하여 그랄에 머무는 순간, 모든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그곳에 머무는 목적에 정확히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의 죄는 반복적이고 계획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가든지, 사람들이 묻거든 나를 오라버니라고 하시오. 이것이 당신이 내게 베풀 은혜요." 이것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수시로 만나고, 그분의 능력과 선하심을 체험했음에도, 자기 유익을 위한 잔꾀는 버리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약합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서는 모든 체험과 배움을 망각해버리는 추한 동물입니다. 혹시 우리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나의 세속적 유익을 위해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잔꾀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범했다면 그것은 아브라함이나 사라에게 죄를 지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나에게 짓는 죄'라고 하십니다. 다윗도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범했을 때 "내가 하나님께만 범죄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탕자도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요셉도 보디발의 아내를 거절하며 "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모든 죄는 그 경중을 막론하고 하나님께 짓는 죄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죄라도 그 형량은 사형입니다. 천지만물의 왕이신 하나님을 대상으로 짓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죄값을 다 치르려면 백 번 죽어도 모자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대신 죽음이 필요했습니다. 우리 생명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득죄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매일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합니다. 성도의 삶에서 죄와 싸우려는 분투가 없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세상과의 구별을 이야기하겠습니까?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자기 숭배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순종하는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 호통쳤습니다.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했소? 당신은 합당치 않은 일을 한 거요!" 세상을 대표하는 왕이 성도의 대표인 믿음의 조상을 꾸짖는 이 장면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야단맞는 삶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세상을 책망하고 심판해야 할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꾸중을 듣는다는 것, 그것은 웃지 못할 코미디입니다.

아비멜렉은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나는 의로운 백성이며,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조차 그의 온전함을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 중에도 자신의 삶을 당당히 내놓으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고맙다면, 그 고마움에 빚진 자로서의 삶이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어느 시인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 / 봄에서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을 /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 온 쌀인데 / 그렇게 허겁지겁 삼켜버리면 /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 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밥 한 숟가락도 고마움을 느끼며 먹으라고 합니다. 고마움을 모르는 자는 사람도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열심과 집요한 사랑을 알면서도, 고마움 없이 자신의 인생을 바쁘게 살아간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자기를 사랑하느라 하나님의 약속도 팽개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언제든 죄 짓는 것도 불사하는 삶이라면, 그것은 나르시스의 비극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반해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에 끌려 물에 빠져 죽은 나르시스. 그의 비극은 자기 숭배였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느라 다른 이들의 사랑을 무시하고, 섬김의 삶을 살지 못한 자아 숭배의 최후는 사망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선'을 이루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사라에게 은 천 세겔을 주고, 양 떼와 소 떼와 종들을 선물했으며, 자기 땅을 내어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격이나 노력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온전한 하나님만의 작품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계속 불가능하고 추악한 모습만 보이는데,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따라 부지런히
'선'을 이루어가십니다. 이것이 새 창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대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켜 가십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 홀로 완성하시는 은혜의 땅입니다. 그 백성들을 탄생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땅에 들어왔고, 하나님은 그렇게 탄생한 당신의 백성들을 훈련하고 연단하며 성숙시켜 가십니다.

그들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성실하거나 순결해서도 아닙니다. 여전히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습성을 버리지 못함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열심으로 그들을 목표 지점으로 끌고 가십니다. 왜? 창세전에 당신의 언약 속에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진리를 압니다. 우리의 죄까지도 선용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압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사용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아, 그럼 계속 죄를 지으며 살아도 되겠네"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토록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이기에,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숭배하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순종하는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야단맞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칭찬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 아닌 다른 이웃들과 하나님께 반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섬김에 푹 빠져 사는 참 그리스도인의 삶. 그것이 은혜에 빚진 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자녀답게 잘 삽시다. 그분은 모든 것을, 심지어 우리의 죄까지도 선용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비멜렉이 사라에게 말했듯이,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 그 선은 하나님이 홀로 이루시는 선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은혜 안에서 감사하며, 그분께 빚진 자로 살아갈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