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님께서 그대로 이루시니.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사람이 너의 씨가 될 것이니, 사라가 너에게 말한 대로 다 들어 주어라."(창세기 21:1,12)
어떤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위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났습니다. 아내는 이미 경수가 끊겼고, 노인 자신도 몸의 기력이 다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기다리다 지쳤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여종을 통해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스마엘이었습니다. 노인은 그 아들을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그 약속의 성취일 것이다. 내가 찾아낸 방법이 옳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그것은 약속의 성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보다 먼저 움직인 결과였습니다. 조급함과 자기 확신이 만들어낸 산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십수 년이 흘렀습니다. 노인은 이제 백 살이 되었고, 아내는 아흔 살이 되었습니다. 그 어떤 의학적 가능성도 남아있지 않은 나이였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움직이셨습니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삭의 탄생을 기록한 창세기 21장 1~2절에는 "말씀대로"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성경은 이 탄생이 어떤 인간적 노력의 결과도 아님을 반복해서 못 박습니다. 심지어 1절에서 하나님이 사라를 "권고하셨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파카드'는 '방문하다, 보살피다, 지키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번이나 팔려가는 수모를 당한 사라를 끝까지 찾아가 보살피고 지켜낸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인간의 배신과 실패를 넘어, 하나님의 열심이 약속을 완성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 긴 세월을 기다리셨을까요?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먼저 시도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기각되었고, 조카 롯을 통한 가능성도 사라졌으며, 이스마엘이라는 육신의 열매도 부정되었습니다.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카드가 테이블 위에서 치워진 뒤에야, 하나님의 카드가 등장했습니다. 인간의 가능성이 완전히 소진된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자리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고대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패턴을 반복하는지 아십니까?
어떤 이는 오랫동안 관계의 회복을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합니다. 심리 상담도 받고, 책도 읽고, 전략도 세웁니다. 그러다 마침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리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고, 그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회복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가능해진 그 자리를 일하시는 기점으로 삼으십니다.
백 살이 되기까지의 아브라함의 기다림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단순히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학교였습니다.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독수리가 새끼를 훈련시키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면 이 비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미 독수리는 처음에 새끼에게 먹이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둥지를 흔들고 새끼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립니다. 새끼가 떨어지기 시작할 때, 어미는 날아 내려가 날개로 받아냅니다.
이 훈련을 반복하면서 새끼는 결국 폭풍 속에서도 날개를 펼 수 있는 독수리가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 년을 바로 이 독수리 훈련에 빗댔습니다(신 32:9~11).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사십 년 돌아가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낭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투자였던 것입니다.
사라가 이삭을 낳았을 때 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창 21:6). 그 웃음의 무게를 이해하려면, 그 전의 웃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라는 이미 한번 웃은 적이 있습니다. 천사들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할 때, 그녀는 장막 뒤에서 비웃었습니다(창 18:12). 그것은 불신에서 나온 비웃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품에 안고 나온 웃음은 달랐습니다. 오랜 기다림과 상처와 눈물을 통과한 뒤에 터져 나온, 진짜 행복에서 우러난 웃음이었습니다. 죄와 조급함은 사망을 낳지만, 기다리는 신앙은 결국 웃음을 낳는 것입니다.
이삭의 탄생은 그 자체로 완결된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더 큰 사건을 가리키는 예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약속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임을 밝힙니다.
이삭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곳곳에서 예수님의 그림자가 보입니다. 이삭은 성령을 따라 태어났고(갈 4:29), 예수님도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눅 1:35). 사라는 단산 상태의 불임이었고, 마리아는 사내를 알지 못한 처녀였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에 태어났고(창 21:2), 예수님은 "때가 차매" 오셨습니다(갈 4:4).
이삭은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을 올랐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셨습니다. 죽어야 했던 이삭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 덕분에 살아서 내려왔고, 예수님은 친히 어린양이 되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모든 유사성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이삭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그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가 오신 것도, 그와 연합하여 거듭난 교회가 탄생한 것도, 모두 인간의 요구나 자격이나 노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이삭의 이야기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야기의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두 가지 언약의 상징으로 해석합니다(갈 4:21~31).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인간의 가능성과 노력에 근거한 옛 언약, 곧 율법을 상징합니다. 사라에게서 난 이삭은 인간의 가능성이 완전히 소진된 자리에서 주어지는 은혜의 새 언약을 상징합니다.
이 두 언약은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이삭이 젖을 떼는 날, 충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충돌의 구도가 흥미롭습니다. 히브리 아이들이 보통 세 살에서 다섯 살에 젖을 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삭이 젖을 뗄 때 이스마엘은 이미 열여덟 살 가까운 청소년이었습니다. 근육이 붙고 목소리가 굵어진 소년이 서너 살짜리 아이를 조롱하는 장면입니다. 결과는 뻔합니다. 이삭은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처한 현실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은혜로 사는 성도는 언제나 약자입니다. 자기 힘을 쌓고 권력을 키워 강해지려는 세상 앞에서, 섬기고 용서하고 내어주며 사는 성도의 모습은 조롱거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작은 이삭의 편을 드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스마엘을 광야로 쫓아내셨습니다. 이것이 구속사의 결론인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수님을 묘사할 때 사용한 언어들을 보십시오. "연한 순", "마른 땅에서 나온 싹", "고운 모양도 훌륭한 풍채도 없는" 존재(사 53:2). 이것은 젖먹이 이삭의 이미지와 정확히 겹칩니다. 멸시당하고 버림받으며, 상대방을 위해 징벌을 받아주는 삶이 이삭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그 약함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무기가 되었습니다(창 3:15). 시편 기자는 어린이와 젖먹이의 입술로 하나님이 원수를 꺾으신다고 말합니다.(시 8:2). 골리앗처럼 거대한 장수를 통해 싸우시는 것이 아니라, 물맷돌 하나를 든 소년을 통해 승리하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몸에 가시를 허락해달라고 세 번을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후 12:9). 바울은 그 역설을 깨달은 뒤 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 위로가 아닙니다. 구속사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의 작동 원리입니다.
성도는 이 역설을 머리로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몸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세상이 조롱해도 당해주고, 손해를 봐도 용서해주고, 강해지려 하지 않고 섬기는 삶이 이삭의 삶이고, 예수님의 삶이고, 성도의 삶입니다.
창세기 21장 20절은 이스마엘이 "활 쏘는 자"가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되었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사실 "점점 커졌다, 위대해져 갔다"는 의미의 분사형입니다. 이스마엘은 계속해서 강해져 갔습니다.
오늘날의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과 기술은 인간의 가능성을 끝없이 확장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한계를 밀어붙이고, 생명공학이 노화와 죽음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미국의 일부 연구소들은 노화를 자연 현상이 아닌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규정하고 불멸을 목표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영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신념, 그것이 현대판 이스마엘의 정신입니다. "하면 된다"는 행위 절대주의가 갈수록 더 견고해지는 시대입니다.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성도는 작은 이삭처럼 보일 것입니다.
자기 힘을 키우는 대신 하나님께 의존하고, 강함을 추구하는 대신 섬기는 삶을 선택하는 성도는 세상의 눈에 소년 다윗처럼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땅과 하늘의 기상을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 이 시대의 징조는 왜 읽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2:54-56) 바벨탑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이스마엘들은 때가 차매 광야로 쫓겨날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전쟁터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입니다. 구원받은 성도 안에도 이삭과 이스마엘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떤 날은 이삭이 이깁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고, 억울한 상황에서도 용서를 선택하고, 성과가 없어도 묵묵히 섬기는 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날은 이스마엘이 고개를 듭니다. 남보다 더 인정받고 싶고, 손해를 보면 분해서 잠을 못 이루고, 내 방식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스마엘은 세련된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나는 열심히 하고 있잖아", "이 정도면 됐지", "내 능력으로 이걸 이뤄낸 거야."
성화란, 그 이스마엘을 날마다 광야로 쫓아내는 과정입니다. 자기 힘으로 행복을 쟁취하려는 옛 사람을 내보내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드는 새 사람이 자라가도록 공간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창 21:11)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마엘을 내보냈듯이, 우리도 매일 그 고통스러운 선택을 반복해야 합니다.
창세기 21장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결국, 당신은 이스마엘로 살겠는가, 이삭으로 살겠는가인 것입니다. 이스마엘의 삶은 화려합니다. 점점 강해지고, 점점 커집니다. 그러나 그 끝은 광야입니다. 이삭의 삶은 초라해 보입니다. 열여덟 살짜리 소년에게 조롱당하는 서너 살짜리 아이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편이십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는 영원한 기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약한 모습으로 살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삶,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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