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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죄와 벌, 그리고 죄와 은혜 - 불가능한 인간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8.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네가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행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나로 하여금 네가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그러므로 그 여자를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창세기 20:6)

창세기 20장은 읽을수록 당혹스럽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바로 눈앞에서 목도했고,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를 뼛속 깊이 경험했으며, 심지어 하나님을 붙들고 중보의 기도까지 올렸던 아브라함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우리가 기대하던
‘성숙한 믿음의 조상’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25년 전 애굽에서 보여주었던 그 치졸하고 비겁한 모습이 그대로 반복됩니다. 아브라함은 그랄에 이르러 또다시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이고, 결국 그녀를 왕 아비멜렉의 손에 넘깁니다.

그것도 그냥 사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이 태중에 있는 바로 그 사라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을 정면으로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사라가 없으면 약속도 없고, 이삭도 없으며, 열국의 아비라는 호칭도 무의미해집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장면을 삭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노골적으로 기록합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흔히 믿음의 사람이라면 점점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패는 줄어들고, 실수는 사라지고, 신앙은 상승 곡선을 그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아브라함의 삶은 그런 도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는 위대한 믿음의 순간과 비참한 실패의 순간을 동시에 살아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실패의 순간마다 언약을 취소하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쪼갠 고기 사이를 홀로 지나가셨습니다. 그 장면은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의 성실이나 충성에 달려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언약은 하나님 자신의 쪼개짐, 곧 하나님의 일방적인 책임으로 성립됩니다. 인간은 그 언약을 유지할 능력도, 지킬 자격도 없습니다.

그런데 16장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인간적인 계산과 조급함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은 그 행위를 즉시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13년 동안 침묵하십니다. 그 침묵은 인간의 열심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17장에서 할례 언약이 주어집니다. 할례는
‘쪼개짐’의 표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이 피 흘림과 죽음을 통해서만 성취된다는 사실을 몸에 새기게 하십니다. 그 쪼개짐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웃습니다. 사라는 비웃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조차 인간은 끝까지 불가능합니다.

바로 그 다음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창세기 20장입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직전, 성경은 일부러 아브라함을 가장 초라한 자리로 끌어내립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삭은 이 사람의 믿음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 약속은 이 사람의 성숙에서 성취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팔아넘깁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신의 안전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결코 과거의 실수가 아니라, 반복적이고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개입하십니다. 잘못한 사람은 아브라함인데,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나타나 경고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도덕적으로 아브라함보다 훨씬 나은 인물입니다. 그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행했다고 항변하고, 실제로 사라를 범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문제를 바로잡는 경외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심판의 대상으로 세우고, 아브라함을
“선지자”라 부르십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해야 네가 살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구원의 본질을 봅니다. 구원은 도덕의 문제도 아니고, 성실함의 문제도 아닙니다. 구원은 선택과 은혜의 문제입니다.

아비멜렉은 죄의 결과로 심판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죄를 지었지만, 은혜로 덮임을 받습니다. 이 차이는 인간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약속하신
“명년에 태어날 이삭” 때문입니다. 그 약속의 자녀가 아브라함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심판이 아니라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죄는 동일하지만, 결과는 다릅니다. 한쪽은 벌로 끝나고, 한쪽은 은혜로 덮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자랑할 것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은 인간이 쌓아 올린 공로의 탑 위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무능과 불가능함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 없는 것들을 택하십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내가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내가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반복적으로 실패하고, 계획적으로 죄를 짓고, 여전히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은혜로 찾아오셔서 우리 안에 새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창조를 홀로 완성해 가십니다.

이 은혜를 아는 만큼, 우리는 자신을 부인하게 됩니다. 자기 부인의 극치가 순교입니다. 순교는 실패의 극점처럼 보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끝나는 삶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자리를 신앙의 최고봉이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더 이상 자기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이 몸으로 드러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모든 성도를
‘순교자’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매일매일의 자기 부인, 매일매일의 작은 순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하나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다.”(누가복음 16:15) 사람 앞에서 의로워 보이려는 삶, 사람 앞에서 성공과 능력을 증명하려는 신앙,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는 열심은 하나님 앞에서는 오히려 미움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방식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브라함의 추락 같은 자리,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무너진 자리,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고백 위에 세워집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유(有)의 자리를 내려놓고 무(無)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새 창조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자랑은 오직 하나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은혜뿐인 것입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