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세기 말씀 묵상

브엘세바의 나그네 - 세상 한복판에서 하늘을 사는 사람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1.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창세기 21: 22,33)

사막 한가운데 물이 있어도 눈이 멀면 볼 수 없습니다. 하갈이 그랬습니다.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광야로 쫓겨난 그녀는 물이 떨어지자 아이를 덤불 아래 눕혀두고 멀찍이 물러앉아 울었습니다.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며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녀의 눈을 여셨을 때, 우물이 보였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줄곧 거기 있었던 우물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창 21:19).

이것이 죄인의 형편입니다. 생수가 바로 옆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방성대곡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눈을 여시면 비로소 보입니다. 구원이란 이처럼 내가 찾아낸 것이 아니라, 눈을 열어주신 분의 은혜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 그 우물이 있는 땅, 브엘세바에서 시작됩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났던 그 땅으로 이번에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이사를 와서 자리를 잡습니다. 약속의 자손이 세상의 땅 한복판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수도원 운동이 한창이던 중세 유럽에는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홀로 사는 것을 최고의 신앙으로 여기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오염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면 세상과의 접촉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불신자와는 상종도 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믿는 사람들끼리만 모여 살아야 신앙이 지켜진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만일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라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10).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불신자와 완전히 격리된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빛은 어두운 곳에 있어야 빛입니다. 등불을 이미 밝은 방에 두면 아무도 그 빛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소금은 음식 속에 녹아들어야 맛을 냅니다. 소금통 속의 소금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성도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진리를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의 땅 브엘세바에 이사 와서 살면서도, 그 땅의 방식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세상 한복판에 있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구별됨이 결국 세상 사람의 눈에 포착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랄 왕 아비멜렉이 군대 장관 비골을 데리고 아브라함을 직접 찾아왔습니다. 왕이 신하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군대 장관까지 대동하고 친히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창 21:22).

이 장면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상상합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부자가 되었으면, 군대가 얼마나 강해졌으면, 왕이 직접 찾아와 동맹을 맺자고 하겠는가.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의 복을 받아 세상이 무시하지 못할 만큼 강해져야 한다.' 번영신학의 논리가 바로 이 구절에 착지하려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이 그 해석을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창 21:25). 아비멜렉이 '당신의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칭찬하는 그 순간, 아브라함은 자신이 직접 판 우물을 아비멜렉의 종들에게 빼앗기며 살고 있었습니다. 단 한 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허구한 날 당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강한 자가 누구입니까? 부유한 자가 누구입니까? 아비멜렉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비멜렉은 왜 그 아브라함을 찾아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말했을까요? 무엇을 보았기에 그런 말을 했을까요? 그것은 세상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힘은 아비멜렉이 더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다름'이었습니다.

자기 우물을 빼앗겼는데 칼을 들지 않았습니다.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힘으로 되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평온함, 세상의 문법으로는 번역이 되지 않는 삶의 방식이 아비멜렉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로부터 2,000년 후, 이 장면의 완성판이 십자가 위에서 펼쳐집니다. 완전히 벌거벗겨져 군중의 조롱을 받으며 죽어가시던 주님 앞에서, 그 처형을 집행하던 로마 백부장이 고백했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 그 고백을 이끌어낸 것은 주님의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철저한 낮아짐, 완전한 비워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세상의 강함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구별된 삶으로 증명됩니다.

주후 1세기, 로마 제국 전역에 작은 공동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노예와 귀족이 한 식탁에 앉았고, 자기 재산을 팔아 모르는 이의 필요를 채웠으며, 전염병이 돌 때 환자를 버리고 도망치는 이웃들과 달리 병자들 곁에 남아 간호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들은 이 기이한 공동체를 기록하면서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익이 없는데 왜 저렇게 하는가, 보상이 없는데 왜 저 사람들을 섬기는가, 그것이 바로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구별됨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결과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아온 것처럼, 세상이 교회를 주목했습니다. 세상의 힘을 더 많이 가져서가 아니라, 세상의 힘을 포기함으로써 세상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새 언약, 새 계명 속의 약속의 자손의 특징은 사랑이라고 간결하게 정리합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요일 2:10).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살아낸 것, 초대교회가 로마 제국 안에서 살아낸 것, 그 본질은 하나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새 언약에 속한 자들만이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언약을 맺는 장면에는 흥미로운 숫자가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암양 일곱 마리를 따로 놓았고, 그 일곱 마리를 아비멜렉에게 주면서 자신이 이 우물을 팠다는 증거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이
'일곱'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수량이 아닙니다. 히브리어에서 '맹세'(솨바)'일곱'(쉐바)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일곱은 완전수, 곧 언약의 완전성과 불변성을 상징합니다. 브엘세바라는 이름 자체가 '맹세의 우물' 또는 '일곱 우물'이라는 뜻을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단순한 재산권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이 완전하고 불변하다는 것을 이 행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반드시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앙을 이 일곱 암양 속에 담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을 마친 후, 아브라함은 에셀 나무를 심었습니다. 나무를 심는다는 것이 어떤 행위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씨앗을 뿌리거나 어린 묘목을 심어서 그것이 충분히 자라 열매를 맺고 그늘을 드리우려면 수십 년이 걸립니다. 평생 그 자리에 있을 생각이 없는 사람, 혹은 이 땅이 언젠가 자기 것이 되리라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나무를 심지 않습니다. 임시로 머무는 곳에는 나무 대신 텐트를 칩니다.

아브라함이 에셀 나무를 심은 것은 선언입니다.
"나는 이 땅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내 후손의 것이 될 것을 믿는다." 지금 당장 눈앞의 현실은 아비멜렉의 종들에게 우물을 빼앗기며 사는 처지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렌즈로 보면 이 땅은 이미 약속된 기업입니다. 실제로 수백 년이 흐른 후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했을 때, 브엘세바는 그 땅의 최남단 경계가 되었습니다(삿 20:10).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약속과 달라 보여도, 약속을 주신 분의 신실하심을 근거로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을 확신하며 지금 여기서 그 미래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장면의 마지막을 묘한 한 문장으로 닫습니다.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창 21:34). 아브라함은 그 후로도 오랜 세월을 브엘세바에서 살았습니다. 아내 사라가 죽어 헤브론에 장사하고 다시 돌아와 175세까지 살았으니, 거의 평생을 그곳에서 보낸 셈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끝까지 그 땅을 '블레셋의 땅'이라 부릅니다. 아브라함의 땅이 아닙니다.

왜일까요? 아브라함이 그 땅을 자신의 최종 목적지로 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래 살았지만 뿌리 내리지 않았습니다. 나무를 심었지만 그 나무와 함께 거기 영원히 머물 생각은 없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

나그네는 현재 있는 곳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짐을 지나치게 늘리지 않습니다. 그 땅의 방식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향해 가는 본향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블레셋 땅에 살면서도, 그 땅이 자신의 전부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삶의 거처를 자주 옮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재산을 모으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어디에 최종적인 소망을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땅에서의 성취인 명예, 재산, 건강, 인정을 신앙의 최종 목표로 삼느냐, 아니면 그것들을 나그네 길의 잠시 머무는 여관으로 여기며 더 나은 본향을 향해 걸어가느냐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를 직접적으로 경고합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9). 땅의 일을 신앙의 최고 목표로 삼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아브라함이 에셀 나무를 심고 한 일이 있습니다.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창 21:33). 이 문장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는 말은 단순히 소리를 높여 하나님의 이름을 외쳤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이 표현은 일관되게 '의지하다, 헌신하다, 예배하다'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자리에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을 부름'의 의미는 창세기 4장과 대조할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 성을 쌓고 그 성과 아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 4:17). 원어의 표현은 성과 아들의 이름을 '선포하며 높였다'는 뜻을 함의합니다. 세상의 힘인 성벽을 숭배하고, 자기 자신의 연장선인 아들을 숭배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가인은 세상과 자기 자신을 예배했습니다. 반면 아벨 대신 주어진 셋의 후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 4:26).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이 두 계열이 오늘까지 이어져 옵니다. 한쪽은 세상의 힘과 자기 자신을 예배하며 삽니다. 돈을 예배하고, 명예를 예배하고, 쾌락을 예배하고, 자신의 꿈과 야망을 예배합니다. 다른 쪽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삽니다. 이 두 예배는 결코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맘몬,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섬기다''예배하다'입니다. '예배(worship)''worth(가치)''ship(됨됨이)'의 합성어입니다. 무엇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사느냐, 무엇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조직하느냐가 곧 예배입니다. 이 의미에서 예배는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의 선택이 예배입니다.

아침에 무엇을 먼저 생각하는지, 갈림길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는지, 손해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모든 것이 예배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물을 빼앗기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나그네로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것이 그의 예배였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일곱째 날로 완성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모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후렴구가 붙습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는 이 후렴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날은 영원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안식을 뜻하는
'솨바트''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가다, 제 자리에 앉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이란 그분이 지으신 피조물들이 그분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조물의 안식이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삶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왕인 줄 알고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조직하며 살 때, 삶은 끝없는 경쟁과 불안과 비교와 피로의 연속입니다. 쉬려 해도 쉬어지지 않습니다. 더 많이 가지면 쉬어질 것 같지만, 더 많이 가지면 더 많이 불안합니다. 반면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분의 뜻을 구하며, 그분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은 역설적으로 진정한 쉼을 줍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른, 상황을 초월한 평안입니다.

주일 예배는 그 안식을 맛보는 자리입니다. 엿새 동안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다가, 일곱째 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그분께 예배하는 것이 창조 질서 안에 담긴 예배의 원형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부담이 아닙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나그네가 하룻밤 쉬는 여관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갈 그 영원한 집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쉽게 거르는 사람은 솔직히 말해서 아직 참된 안식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안식을 찾고 있다는 뜻입니다. 골프장에서, 침대 위에서, 여행지에서 안식을 찾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참된 안식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림자를 붙들고 실체를 포기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수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어느 사막 지대에서 있었던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이 도시에서, 이 시대에, 우리 각자가 살아내야 할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브엘세바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 한복판에서 일하고, 밥 먹고, 관계를 맺으며 삽니다. 우리 옆에도 아비멜렉이 있고, 우물을 빼앗는 이웃이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 우물을 빼앗기며 삽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손해를 입습니다.

그 자리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세상과 똑같이 이를 갈고 복수를 다짐하는가, 아니면 아브라함처럼 힘으로 대항하지 않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온을 보이는, 그 구별됨 속에서 세상은 하나님을 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에셀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그 믿음을 삶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땅을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뿌리는 여기가 아니라 하늘에 있음을 알고, 이 땅의 것들을 움켜쥐기보다 흘려보내며, 하늘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 걸음걸음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삶이 예배입니다. 세상의 이름 대신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자신의 이름 대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이며,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이며, 우리가 날마다 살아내야 할 사명입니다.

브엘세바의 나그네 아브라함이 에셀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이 분주한 세상 한복판에서 잠시 멈추어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