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세기 6:8)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억 중 하나는 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중동,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여러 고대 민족들은 모두 “한때 세상이 거대한 물에 잠겼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길가메쉬 서사시, 아트라하시스 서사시 같은 고대 기록 속에도, 우리는 ‘모든 것을 덮친 대홍수’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비슷한 상상력이 퍼진 것이 아닙니다. 마치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사건을 목격하고, 세월이 지나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게 된 것처럼, 그 이야기들의 뿌리는 실제 있었던 역사에 닿아 있습니다. 성경은 그 사건을 하나님의 영감 속에 가장 정확하게 기록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노아의 홍수입니다.
창세기 6장은 한 장면을 우리 눈앞에 펼쳐줍니다.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가득하였다." 사람들의 생각과 계획은 늘 악했고, 폭력과 부패가 세상을 뒤덮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단하십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되, 그러나 은혜를 베풀기로 하십니다. 그 은혜의 표징이 바로 방주였습니다.
흥미롭게도, 히브리어로 ‘방주’는 테바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두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한 번은 노아가 타고 홍수를 견뎌낸 방주, 또 한 번은 나일 강 위에 떠 있던 아기 모세의 갈대 상자입니다.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갈대 상자는 겉모습이 전혀 다릅니다. 하나는 거대한 나무 구조물이고, 하나는 작은 바구니에 진흙과 역청을 바른 것입니다. 하지만 둘 다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물 위에서 죽음으로부터 지켜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심판에서 구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자를 새로운 사명으로 이끌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미 ‘물 위의 상자’는 하나님의 구원 도구라는 언어를 만들어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물’은 종종 혼돈, 죄, 심판,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사야 57장 20절은 악인을 ‘진펄과 더러운 것을 던지는 바다’에 비유했고, 시편 32편 6절은 환난의 큰 물이 의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노래했습니다. 노아 시대의 홍수, 모세가 건넌 홍해, 예수님이 걸으신 갈릴리 바다, 이 모든 ‘물’은 인간이 스스로 건널 수 없는 절망과 저주의 상징입니다.
홍해 사건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앞에 갇혔습니다.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넘실거리는 바다가 길을 막았습니다. 그때 모세가 지팡이를 들자, 하나님이 바다를 가르셨습니다. 애굽의 군대는 그 바다에 빠져 죽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마른 땅처럼 건넜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구출 작전이 아니라,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모세는 훗날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너희 가운데서 일으키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신 18:15)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 제자들이 풍랑에 시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배를 저어가고 있었지만, 바람은 거세고 물결은 높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놀라운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물’을, 곧 심판과 혼돈, 저주의 상징을 완전히 주관하시는 분임을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전날 있었던 오병이어의 기적조차, 그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기적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기적 속에 담긴 메시지를 이해할 때 믿음이 생깁니다.
성경은 많은 책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은 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노아의 방주, 모세의 갈대 상자, 홍해의 기적, 예수님의 물 위 걸음, 이 모든 이야기는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심판의 물 위를 건너게 하시는 분, 저주의 물 위를 걸어오시는 분, 그리고 그 위에서 우리를 품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도 각자의 ‘물’ 위에 서 있습니다. 어떤 이는 죄책감이라는 깊은 바다 위에, 어떤 이는 불안과 두려움의 파도 위에, 어떤 이는 슬픔과 상실의 깊은 물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여전히 그 물 위를 걷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혼자 걷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품고, 붙들고, 마른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가라앉지 않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물 위를 걷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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