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세기 4:26)
우리는 누구나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가슴에 안고 살아갑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철학적인 물음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뿌리와 같습니다. 성경은 그 물음에 대해 단순하고도 분명하게 답합니다. 인류는 두 갈래의 계보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각 사람은 반드시 그 둘 중 하나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의 가인과 5장의 셋, 이 두 인물의 후손 이야기는,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거대한 선언입니다.
가인의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그는 최초의 살인자였습니다. 아벨을 죽인 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고 땅 위에서 유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 이후 가인의 후손들이 오히려 ‘문명의 개척자’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야발은 유목민 문화를 열고, 유발은 음악의 조상이 되며, 두발가인은 청동기와 철기문명을 발전시킵니다. 그들은 도시를 세우고, 문화를 창조하고, 기술을 발달시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참으로 인류의 진보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들을 결코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없이 살았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문명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았고, 그 삶의 목적도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가인의 후손인 라멕은 “자기를 상하게 한 자를 죽였다”고 자랑하며 폭력을 미화합니다. 그는 또다른 살인자이며, 아내를 두 명 두는 다처제를 처음 도입합니다. 생명의 가치가 무너지고, 가정이 깨지고, 자기를 위한 쾌락과 힘이 최고의 가치가 된 사회가 펼쳐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없는 문명의 전형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을 이루고, 자기 만족과 쾌락을 위해 문명을 활용하며,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여기는 삶입니다. 현대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기술과 문명을 발전시키며 자랑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과와 스펙, 영향력을 삶의 목적처럼 삼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을 때, 그것은 결국 유리하고 방황하는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쌓은 문명은 화려해 보이지만, 하나님 없이 쌓은 탑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입니다.
가인의 계보와는 대조적으로, 창세기 4장 마지막 구절에서 처음으로 밝은 소식이 들립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이 구절은 성경 전체를 밝히는 횃불과도 같습니다.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예배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셋의 후손들은 외형적으로 눈부신 문명을 이루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벨이 그랬던 것처럼, 셋의 후손들은 자기의 것을 드리며, 하나님께 ‘제사장’처럼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 맺고, 예배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자기의 삶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세상에서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들의 삶은 하늘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계보는 오늘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나는 가인의 후손입니까, 셋의 후손입니까? 물론 육체적으로 우리는 모두 아담의 후손입니다. 하지만 삶의 방향과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우리는 영적으로 가인의 길을 따를 수도 있고, 셋의 길을 따를 수도 있습니다. 나는 문명과 성공, 성과를 통해 나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와 순종을 삶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내 인생의 목적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은 왕이셨지만 다스리려 하지 않으셨고, 선지자셨지만 자신을 높이지 않으셨으며, 제사장이셨지만 자기 자신을 드려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인의 삶을 뒤엎고, 아벨과 셋의 삶을 완전히 성취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죽임당하신 어린양으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예배를 드리셨고,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세상은 성공을 향해 달려가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성과를 쌓으며, 남보다 앞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은 정반대입니다. 자기의 것을 내려놓고, 자신을 제물로 드리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걷는 길이 바로 진짜 왕의 길입니다. 하늘의 왕은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드리는 삶을 통해 진정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길을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유리하는 문명의 후손으로 살 것인가, 예배하는 백성으로 살 것인가. 예수님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나라로 부르셨습니다. 그 길은 세상 기준으로는 손해 보는 길처럼 보이지만, 하늘의 관점에서는 가장 깊고 견고한 승리의 길입니다. 오늘도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며, 자기 자신을 기꺼이 드릴 줄 아는 제사장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벨처럼, 셋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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