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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맞아 죽는 삶, 도피성의 은혜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7. 31.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피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세기 4:10)

우리는 모두 가인입니다. 성경은 살인을 단지 흉기나 주먹을 들어 남의 생명을 끊는 물리적 행위로만 정의하지 않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곧 살인자요, 형제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은 곧 가인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기준 앞에, 그 누구도 죄 없는 자라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도 누군가를 속으로 저울질하고, 비교하고, 나보다 낮게 여기며 조용히 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나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원래 나는 고의적 살인자입니다. 의도적으로, 반복적으로, 내 안의 죄된 본성과 결탁하여 타인을 죽이고 공동체를 해치고 하나님의 형상을 모독하는 자입니다. 그런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힘입어, ‘
우발적 살인자’로 간주된다는 사실은 복음 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입니다.

성경은 가인의 살인을 단지 한 개인의 범죄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아벨은 어떤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복음은, 성도의 삶이 바로 그 아벨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가인의 나라입니다. 성공, 비교, 자아실현, 자기 보호의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이 시스템에서 아벨은 견디지 못합니다. 그 누구보다 순결하고 거룩한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그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맞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무기력한 패배가 아닙니다. 오히려 ‘
맞아 죽는 자’가 복음을 가장 잘 증언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이 세상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하는 자입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신비롭습니다. 그는 살인을 저지른 후 하나님 앞에 형벌이 너무 무겁다며 두려움에 떱니다. 그는 벌을 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않으시고, 오히려 ‘
’를 주십니다. 이 표는 형벌을 면하게 하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죽지 않지만 평생 방황하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표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을 보여주는 신호입니다.

그런데 도피성 제도는 이와는 또 다른 차원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민수기 35장에서 하나님은 ‘
우발적 살인자’에게 도피할 수 있는 성읍을 제공합니다. 그는 도피성에 도착하면 살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만 그는 보존됩니다. 그러나 그 도피성에서 언제까지 머물러야 하는가? 바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율법 규정이 아닙니다. 복음의 예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는 ‘
해방’됩니다. 고의적 살인자였던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발적 살인자로 간주되고,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나의 죄값이 종결되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교회이며, 또한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조차 아벨처럼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당시 바리새인들을 향해 “
의인 아벨의 피와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를 언급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역사적 회고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도 가인들이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는 자들, 자기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에 의지하는 자들은 항상 가인들의 미움을 사게 됩니다. 신자는 때로 예배의 중심에서 죽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체제의 압력 속에, 잘못된 교회 구조와 리더십 안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피 흘림이 세상의 심판을 부릅니다. 그 피는 “
하나님께 호소하는 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심 받았고, 그것은 곧 세상에서 맞아 죽는 소명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피성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보호받고 있고,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완전히 용서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손해를 감수하며, 끝내는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삶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말합니다. “
예수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피는 정당한 피였습니다. 억울한 죽음, 의인의 피, 심판을 호소하는 피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는 용서를 말하는 피입니다. 그는 스스로 맞아 죽기를 택하셨고, 오히려 그들을 용서해달라 간구하셨습니다.

성도는 이제 이 두 피의 사이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가인이면서 아벨로 살아야 하고, 결국은 예수의 피에 덮인 자로 죽어야 합니다. 그 길은 영광스러운 패배요, 세상을 구원하는 승리의 길입니다.

복음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크고 위대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가게 합니다.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서, 말석에서, 손해 보고, 맞아 죽는 자로 존재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우리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심판하시고, 또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아벨처럼 죽는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았다.” 도피성 되신 그리스도 안에 숨은 자로서, 나는 오늘도 그분의 죽음을 힘입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기꺼이, 이 세상에서 맞아 죽는 자의 삶을 선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