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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하와의 눈물, 교회의 믿음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8. 6.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며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하였더라."(창세기 4:25)

창세기의 첫 장면들은 마치 정적 속에서 펼쳐지는 웅대한 서곡 같습니다. 태초의 질서, 완전한 동행, 창조주의 숨결 속에 살아가던 인류 최초의 남자와 여자,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한순간의 선택, 한 조각 열매로 인해 그들은 에덴에서 추방되고, 인류는 죄의 유전자를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 뱀에게 주어진 저주 속에서 하나님은 뜻밖에도 ‘
복음의 씨앗’을 던지십니다.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 3:15) 이 말씀은 복음의 시작이며, 교회의 기원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온몸으로 껴안은 존재가 바로 하와였습니다.

믿음은 상실의 심연에서 피어납니다. 하와의 인생을 생각해 보면, 에덴에서 쫓겨난 날의 참담함, 남편의 침묵, 고통스러운 해산의 고통, 형이 동생을 죽였다는 소식 등, 하와는 단 한 순간도 평온한 삶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녀가 받은 약속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것이었지만, 현실은 그 약속을 믿기엔 너무나 잔인했습니다. 첫 아들 가인은 살인자가 되었고, 둘째 아들 아벨은 죽었습니다. 그 약속은 거짓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와는
'셋'이라는 아이를 다시 낳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창 4:25) 이 말은 단순한 출산 소식이 아닙니다. 그녀의 신학, 그녀의 복음, 그녀의 믿음이 담긴 신앙 고백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믿었습니다. 자신의 죄가 부른 고통의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약속을 붙드는 것, 죽음 속에서도 생명을 기다리는 것 말입니다.

성경은
‘여자’를 단순한 성별의 존재로만 보지 않습니다. 하와는 교회의 원형입니다. 고통 중에 생명을 낳는 자,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 자기 탓이라 말하며 울 수 있는 자, 세상의 죄를 외면하지 않고 끌어안는 자,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자세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의 고통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정죄하는가, 아니면 고통을 ‘해산의 진통’처럼 끌어안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세상의 아픔을 자처해서 짊어지고 있습니까?

하와는 단 한 마디로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하나님이 다른 씨를 주셨다."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는 어머니가, 범죄한 아들의 책임을 감당하며, 여전히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교회의 DNA입니다.

하와가 자식들에게 지은 이름은 하나의 신학적 노래입니다. 가인(얻었다)은 기대였지만, 결국 오해였습니다. 아벨(헛됨)은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했습니다. 셋(대신 주셨다)은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눈이었습니다. 에노스(연약함)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고백했습니다.

이 이름들은 단순히 가족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를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하와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해석하고, 자신의 실패를 신학적으로 고백하며, 구원의 소망을 다음 세대에 전달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남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고통 속에서 믿음의 언어로 반응하고 있습니까? 그저 분노와 불평으로 반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와의 신앙은 말 없는 설교요, 살아 있는 복음이었습니다.

교회는
'다른 씨'를 기다리는 여자입니다. 하와는 메시아가 당장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메시아는 오지 않았고, 아벨은 죽었고, 가인은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다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녀의 이 기다림은 단지 자식을 위한 모성애가 아닙니다. 인류를 위한 신앙의 인내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때 메시아를 보내지 않으셨을까요? 하와가 그렇게도 기다렸는데, 왜 바로 보내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은 기다림 속에서 믿음을 세우십니다. 약속을 붙든 자들만이 구원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은 시간과 고통 속에서 단련되며, 결국 하나님을
‘신실하신 분’으로 드러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세상은 점점 악해지고, 죄는 더 교묘해지고, 고통은 더 깊어집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해산하는 여자처럼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기도하고, 회개하고, 다시 사랑을 배웁니다.

하와는 여자였고, 교회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여자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니고 정숙하게 살면, 아이를 낳는 일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딤전 2:15) 이 말씀은 여자가 아이를 낳아야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와의 삶 전체가 구원의 서사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고통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고, 자신의 죄를 깊이 인식하며 세상의 악을 탓하지 않았고, 자식들의 죽음 속에서 다시 씨를 품었습니다.

그 여자의 후손, 그 씨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망을 깨뜨리신 그분이었습니다. 하와는 그 씨를 기다렸고, 우리는 그 씨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하와는 단순한 실수의 아이콘이 아닙니다. 그녀는 신앙의 어머니요, 교회의 원형입니다. 회개의 사람, 기다림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눈물로 복음을 품었고, 죽음을 뚫고 소망을 낳았습니다.

우리의 교회는 하와처럼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믿음으로 씨를 품고 있습니까? 우리도 다시 씨를 품으십시다. 세상이 주는 상처를 껴안되, 그 속에서 다시
‘다른 씨’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외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다른 씨를 주셨다." 그분이 오셨고, 또 오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