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봄날 오후, 한 집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분은 오랫동안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고, 성경 통독도 수십 번 마쳤으며, 금식기도도 여러 차례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분의 얼굴에는 무거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언제쯤 진짜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다른 분들은 기도하다가 눈물도 흘리고, 성령 충만한 것 같은데…… 저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그분의 말을 들으며 목사님은 오래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분은 진지했고, 그 갈망도 진실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그분이 무언가를 깊이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분은 은혜를 받아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마치 아직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처럼, 먼 곳에 있는 것을 애타게 손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바울은 "주실 것이다"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주셨다"고 썼습니다. 이미 완료된 사건입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까? 탕자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눅 15:11~32) 그 이야기에서 종종 잊히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맏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 곁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밭에서 일하고,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탕자가 돌아와 잔치가 벌어지자, 맏아들은 분노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들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그 말을 들은 아버지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 15:31) 이미 다 그의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이 그의 소유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아니, 알았지만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종처럼 살면서, 상속자의 신분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 이 맏아들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영원한 생명이 이미 우리 것이 되었는데,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얻으려고 허둥대고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치하의 감옥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은혜는 값비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저 주어진 것이다." 본회퍼는 값싼 은혜를 경계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은혜가 이미 주어진 것임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문턱 앞에 선 그 감옥 안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현존이 자신과 함께하심을 확신했습니다. 그 믿음이 그를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를 "하나님의 창고 문을 여는 행위"로 이해합니다. 아직 열리지 않은 문을 두드리고, 아직 내려오지 않은 복을 기다리는 것으로 압니다. 물론 기도는 간구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은 그 이상입니다. 기도는 이미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내 곁에, 내 삶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이것은 미래의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관계의 현실을 알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눈을 떠서, 이미 이루어진 연합의 실재를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자녀를 키워본 부모라면 이런 장면을 기억할 것입니다. 갓난아기는 울기 시작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어제 엄마가 안아줬는지, 내일 밥을 줄 것인지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배가 고프면 울고, 품에 안기면 안기고, 졸리면 잡니다. 그 어린아이에게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불안은 없습니다. 이미 사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을 때 (마 18:3), 그것은 단순히 순진해지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를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을 당연하게 여기듯 그냥 받아들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은혜는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이미 와 있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누리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를 있었습니다. 그분은 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는 동안,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극도의 통증 속에서 기도하던 중 이상한 평안이 찾아왔다고 하셨습니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몸은 여전히 아팠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고요함과 따뜻함이 솟아올랐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때 제가 무언가를 새로 받은 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 고통 속에서 늘 거기 계셨던 하나님을 처음으로 제대로 뵌 것 같았어요." 그분의 말이 목사님의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빌립보서 4장 7절이 말하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은 평안한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황을 뛰어넘어 이미 그 자리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 평강을 발견하는 것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늘 있었던 것을 비로소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고신학(古神學)에서도, 개혁신학 전통에서도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화는 새로운 무언가를 덧붙이는 과정이 아니라, 칭의에서 이미 선언된 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롬 5:1)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 살아났습니다.(갈 2:20)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요 1:12) 우리는 이미 성령의 전이 되었습니다.(고전 6:19) 이 모든 것이 과거 완료형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로마서 6장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라"는 말은 회계사가 장부에 기록하듯, 이것을 사실로 인식하고 계산하라는 뜻입니다.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믿음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주술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을, 내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처음 이야기에서 말한 그 집사님에게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집사님 안에 계십니다. 은혜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에요. 다만 우리의 눈이 아직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벽기도도 좋고, 금식기도도 좋습니다. 그런데 오늘부터는 그것을 받으러 가는 길로 생각하지 말고, 이미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시간으로 생각해 보시겠어요?" 그분은 잠시 침묵하더니, 눈가에 조용히 눈물이 고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분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 있습니다. 남은 일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을 온 마음으로, 깨어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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