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적 나는 겁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밤이 되면 혼자 화장실에 가지 못했습니다. 시골 외갓집에 갔다가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성황당을 보면 괜히 등골이 서늘해졌고, 무덤 곁을 지날 때면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습니다. 불을 끄고 누우면 어둠 속 어딘가에서 하얀 소복을 입은 무언가가 나타날 것만 같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떨었습니다. 그 두려움은 근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공포영화에서 본 장면들, 어른들에게 들은 무서운 이야기들이 무의식 깊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어두워지면 그것들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 두려움이 어디서 왔는지를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안고 삽니다. 죽음이 두렵고, 알 수 없는 것이 두렵고, 홀로 있는 것이 두렵습니다. 두려움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 에덴의 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인류와 함께해 온 가장 오래된 감정입니다. 창세기는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의 대답은 단 한 마디였습니다.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그것이 죄 이후 인간의 초상이었습니다. 관계가 끊어진 자리에 두려움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은 단순한 심리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비롯된 영적 상태입니다. 그 빈자리를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채우려 했습니다. 어떤 이는 미신에 기댔고, 어떤 이는 철학으로 두려움을 설명하려 했고, 어떤 이는 명상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의 근원을 건드리지 않는 한, 그것은 다른 모습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 네덜란드의 시계 수리공 집안에서 태어난 코리 텐 붐은 유대인들을 숨겨주다 가족과 함께 나치 수용소에 끌려갔습니다.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 그녀는 죽음을 매일 눈앞에 두고 살았습니다. 동생 베치는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코리 자신도 죽음의 문턱을 여러 번 넘나들었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그녀의 대답은 간결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두려워할 최악의 것은 죽음인데, 그 죽음이 이미 정복되었는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것이 핵심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두려움을 다루는 방식은 두려움의 감정을 억누르거나 두려운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의 대상 너머에 계신 분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 다시는 두려워 말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보다 더 큰 것, 이미 이기신 주님을 주신 것입니다.
시편 23편을 쓴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그가 "사망의 골짜기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골짜기는 실재합니다. 죽음은 실재합니다. 고통은 실재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두려움이 다른 것으로 바뀝니다. 두려움의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이 생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에서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제시한 대안은 철학적 깨달음도, 심리적 훈련도 아니었습니다.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키리라"(빌 4:6~7). 평강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평강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에 맞서다 감옥에 갇혔고, 종전 불과 몇 주를 앞두고 처형당했습니다. 그가 처형 직전에 함께 있던 동료에게 남긴 말이 전해집니다. "이것이 끝이지만, 나에게는 생명의 시작입니다." 죽음 앞에 선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평온한 말이었습니다.
그 평온은 어디서 왔습니까? 그것은 죽음을 부정한 데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 너머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이 마지막 말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두려움을 이기는 방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삶과 죽음 모두가 주님의 손 안에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 고백이 서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상황도 궁극적인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신앙이 있다고 해서 두려움의 감정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고,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담대함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을 품은 채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순종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밤이 두렵고, 미래가 두렵고, 병이 두렵고, 이별이 두렵습니다. 그 감정을 억지로 지워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감정을 그대로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내가 두려울 때에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라고 고백한 것처럼, 두려울 때, 그 두려움이 오히려 하나님 앞으로 이끄는 통로가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은 용기가 아닙니다. 지식이 아닙니다. 철학도 명상도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만들어내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는 고백 위에 서 있는 사랑인 하나님의 선제적 사랑입니다.
우리가 가장 깊은 어둠 속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이미 그 어둠 속에 오셨습니다. 빌립보서의 언어를 빌리면,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빌 4:11)는 고백은 상황이 좋아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상황과 상관없이 나를 붙드시는 분이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앎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그 앎이 어두운 방에서도 평안하게 눕게 합니다. 그 앎이 사망의 골짜기를 걸으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게 합니다.
당신 안에 아직 두려움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두려움을 억누르려 하지 마십시오. 그 두려움의 손을 잡고 하나님 앞으로 걸어가십시오. 두려움은 때로 우리가 스스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고백을 진심으로 드리게 됩니다.
참된 평안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두려움 한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 서 있는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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