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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눈을 뜨는 은혜, 그리고 천천히 보게 되는 믿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1.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한복음 9:25)

요한복음 9장은 하나의 기적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십자가 복음 전체가 압축되어 담긴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한 사람을 고치십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사건을 단순한 치유의 기록으로 남기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
어떻게 사람이 구원받는가”,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깊은 신학적 대답입니다.

앞선 요한복음 7장과 8장에서 예수님은 진리를 명확히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진리에 반응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진리는 들려졌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 요한복음 9장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더 많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자에게 직접 찾아오셔서 눈을 뜨게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이해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결단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즉각적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그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빛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그는 순종했고, 씻는 순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구원의 즉각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눈을 뜨게 하시면, 그 순간 생명이 시작됩니다. 소경이 조금씩 보이다가 어느 날 완전히 보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느 순간 “
보게 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작은 곧 완성을 향한 시작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르심을 받은 자를 이미 “
구원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시작과 끝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을 떴다고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눈을 뜬 이 사람이 자기 눈을 뜨게 해 준 분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그가 어디 있느냐?” “알지 못하노라.” 그는 보게 되었지만, 예수님을 아직 모릅니다. 그는 살아났지만, 구원의 내용을 아직 이해하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9장 35~36절에서 예수님이 다시 그를 찾아오셨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믿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고 싶은 대상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구원이 결정된다는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알고, 판단하고, 선택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나중에야 예수님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을 때(엡 2:1), 누가 우리를 살리셨는지도 모른 채 살아났습니다. 구원은 이해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침투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점진적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사람의 신앙 여정을 보면, 처음에는 예수님을 “
그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후에는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나중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이라 고백합니다. 마침내 예수님 앞에서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며 경배합니다. 이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 사이에는 갈등, 오해, 박해, 고난, 출교가 있었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그의 삶은 더 편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어려워졌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출교는 사회적 사형선고와 같았습니다. 가족에게서도 보호받지 못했고, 공동체에서도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쫓겨난 자리에서 다시 만난 분이 계셨습니다. “
예수께서 그가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그를 만나사…” 세상에서 쫓겨났을 때, 그는 비로소 예수님의 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자리에서 그는 예수님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눈을 뜬 후에 시작되는 길고 느린 배움의 과정인 것입니다.

고난은 구원의 방해물이 아니라 도구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고난을 실패나 저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9장은 고난이 신앙을 성숙하게 하는 필수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세상의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고, 종교 권력의 실체를 보고, 참된 빛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것, 그것을 성경은 거룩이라고 부릅니다. 거룩은 도덕적 우월이 아니라, 속함의 변화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눈을 떴어도 천천히 보게 됩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또 다른 소경을 고치십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처음에 사람을 “
나무 같은 것”으로 봅니다. 다시 안수하신 후에야 밝히 봅니다. 이 장면은 우리 신앙의 현실과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눈을 떴지만, 여전히 흐릿하게 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지만, 부분적으로만 봅니다. 그래서 의심도 있고, 혼란도 있고, 넘어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정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상적인 구원의 여정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의 마지막 고백, “
내가 믿나이다”는 단지 한 사람의 개인적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화의 자리, 즉 완성된 구원의 상징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 13:12) 지금 우리의 믿음은 부분적입니다. 그러나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고백도 온전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안다면, 우리는 서로를 쉽게 정죄할 수 없습니다. 신앙이 더딘 사람, 아직 말이 서툰 사람, 질문이 많은 사람을 향해 “
가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완전한 언어와 행동을 요구하지 않듯, 눈을 뜬 성도에게 완성된 신앙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경쟁이 아니라 여정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요한복음 9장의 소경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날 때부터 보지 못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눈을 뜨게 하셨고, 우리는 아직도 배우는 중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눈을 뜨게 하신 분이, 끝까지 보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봅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입에서 나올 고백은 하나입니다. “
주여, 내가 믿나이다.” 그 고백을 향해,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데리고 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