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내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한복음 9:3~5)
요한복음 9장은 단순한 치유 기적의 기록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게 되었다”는 감동적인 사건을 넘어,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시는지, 그리고 그 구원을 받은 사람은 어떤 자리로 불려 가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구속사적 그림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의 이야기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7장과 8장에서 이어져 온 흐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행위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는 책입니다. 특히 초막절을 배경으로 한 7장과 8장은, 율법과 종교 행위로 자신들의 의를 증명하려는 유대인들과, 오직 자신만이 참 생수이며 참 빛임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극명한 대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물을 길어 제단에 붓고, 빛을 밝히며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 “나는 세상의 빛이다.” 그 말씀 앞에서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빛을 꺼버리려 했습니다. 생수를 거부했고, 돌을 들어 빛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성전을 떠나시며, 한 사람을 만나십니다.
바로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입니다.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소경이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소경을 보셨습니다. 성경이 사용하는 ‘보다’라는 단어는 단순한 시각적 인식이 아니라, 알고 계셨다, 의도적으로 찾아오셨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럴 능력조차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 가운데 태어난 인간의 실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찾아와 주셔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제자들은 그를 보며 질문합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입니까, 부모입니까?” 이 질문은 인간의 본능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고통 앞에서 항상 원인을 찾고, 책임자를 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단번에 무너뜨립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함이다.” 예수님은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고통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를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창조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죄로 인해 뒤틀린 세상 속에서 그 고통을 사용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요한복음 전체가 증언하는 단 하나의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살려내는 일입니다. 즉, 죽은 자를 살리고, 보지 못하던 자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고치십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너무도 독특합니다. 침을 뱉어 흙과 섞어 진흙을 만들고, 그것을 소경의 눈에 바르십니다. 예수님은 말 한마디로도 충분히 고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지저분하고 불편한 방식을 택하셨을까요? 이 장면은 구원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흙은 저주받은 인간의 실존을 상징합니다. 죄로 인해 결국 흙으로 돌아갈 존재, 무력하고 소망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흙에 자신의 침을 섞으십니다. 이는 하늘에서 오신 거룩한 성자 하나님이 저주받은 인간과 하나가 되셨음을 상징합니다. 성육신, 그리고 십자가의 예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저주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당신 자신에게 바르십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실로암으로 보내십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며, 지형적으로는 가장 낮은 곳입니다. 소경은 눈에 진흙을 바른 채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그 낮은 곳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씻습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의 삶 그 자체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분,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십자가를 지신 분,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신 분, 놀라운 것은 요한복음이 이 소경의 이야기를 예수님의 이야기와 나란히 배치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에고 에이미(나는 있다)”라고 선언하신 것처럼, 눈을 뜬 소경도 “내가 그로라(에고 에이미)”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동일시가 아닙니다. 연합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의 삶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결단, 열심의 결과도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시작되고, 하나님의 손으로 완성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는 한 가지 분명한 표지가 나타납니다. 낮아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진흙을 바르실 때가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설명되지 않는 아픔, 사람들 앞에서의 부끄러움과 실패, 그때 우리는 묻습니다. “왜 하필 나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묻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신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지를 보라고 하십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길은 높아지는 길이 아니라, 실로암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 안에서 더 낮은 자리를 선택하는 길입니다. 나의 소경됨을 인정하고, 나의 무력함을 고백하며,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보는 눈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새롭게 창조된 우리는 작은 예수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분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습니다. 낮아짐의 길, 섬김의 길, 자기 부인의 길은 세상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길입니다.
오늘도 실로암으로 내려가십시오. 무릎을 꿇고 씻으십시오. 그리고 빛을 얻은 자로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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