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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눈을 뜬다는 것 - 육신의 눈, 마음의 눈, 그리고 영의 눈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7.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 것이니이다.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 하는도다."(요한복음 9:24~30)

사람은 누구나 보고 삽니다.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하고, 눈으로 사람을 만나고, 눈으로 세상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
보면 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정반대의 말을 합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고 말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핵심은 눈을 뜬 기적 자체가 아닙니다. 진짜 놀라운 것은, 눈이 열린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분명히 그를 보고 있었습니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 고침 받은 사실, 벌어진 사건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말합니다. “
우리는 그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반면, 막 눈을 뜬 이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이 말은 단순한 경험담이 아닙니다. “나는 이제 다른 차원에서 세상을 본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삶은 가장 기본적인 차원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느껴지는 것이 기준입니다. 돈이 있으면 안정된 삶, 건강하면 잘 사는 삶, 사람들의 인정이 있으면 성공한 삶이라고 여깁니다. 이 눈으로 세상을 보면, 고난은 저주이고 실패는 패배이며 잃어버림은 불행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말한 “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고백은 바로 이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정직하게 관찰한 결론입니다. 아무리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아무리 다른 환경으로 옮겨도, 결국 비슷한 문제, 비슷한 갈등, 비슷한 허무가 반복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환경을 바꾸려 합니다. 직장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도시를 바꾸고, 관계를 바꿉니다. 그러나 눈이 그대로인 한,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지 않고, 생각하고 분석하고 질문합니다. “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 고통 속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사람의 행동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단계의 사람들은 세련되고 뭔가 깊어 보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배움을 말하고, 결핍 속에서도 성찰을 이야기합니다. 불교의 수행자들, 철학자들, 도덕적 종교인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분명 육신의 눈만 가진 사람들보다 더 성숙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는 그리스도인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눈은 여전히 ‘
’를 중심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상해 보여도, 아무리 희생적으로 보여도, 그 중심에 “나의 깨달음, 나의 성숙, 나의 의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소경의 삶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경건했고, 누구보다 절제했으며, 누구보다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
소경된 바리새인아.” 왜냐하면 그들의 모든 선행은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 눈은 여기서 완전히 다릅니다. 영의 눈은 인간의 노력이나 수행으로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열리는 눈입니다. 요한복음 9장의 소경은 스스로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기도해서 뜬 것도 아니고, 믿음을 증명해서 뜬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그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은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해석의 중심이 바뀝니다. 이제 그는 묻습니다. “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드러내고 계시는가?” “이 고난 속에서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같은 결혼 생활도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저 사람이 나를 얼마나 만족시키는가’를 보았다면 이제는 ‘내가 이 사람을 통해 어떻게 사랑을 배우는가’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결혼은 시간이 갈수록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환경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 말은 성도가 더 착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도덕적이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삶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선언입니다. 이전에는 내 성공, 내 의, 내 만족이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겉으로 보면 손해 같아 보이는데 속으로는 점점 자유로워집니다. 사람들의 인정에 덜 흔들리고, 결과에 덜 매달리고, 비교에 덜 묶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제 삶을 평가하는 눈이 하늘에 고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을 산다고 해서 우리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자주 넘어지고, 더 많이 들키고, 더 쉽게 무너집니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이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게 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선행은 자기 의를 쌓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사의 열매가 됩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열심히 살다가 예수님께 가장 혹독한 책망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정보를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다르게 소유하는 것도 아닙니다. 삶을 바라보는 중심이 바뀌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에서 마음의 눈을 거쳐 영의 눈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
모든 것이 새롭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이 질문을 마음에 담아보십시오.
"나는 지금 무엇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육신의 눈인가, 마음의 눈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열린 눈인가?" 그 질문 앞에 서는 순간, 이미 우리는 빛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