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한복음 9:39~41)
사람이 눈을 뜬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을 더 많이 보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고,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낯설어지기 시작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본다고 하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역설처럼 들립니다. 보게 하러 오셨다면서, 왜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소경이 되게 하신다고 하실까요. 그러나 이 역설은 복음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언제나 인간의 상식과 어긋난 방식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이 생겼다’,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눈을 떴다’는 표현은 단순히 종교적 감동을 느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평면 세계에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입체 세계를 보게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평면에 사는 존재에게는 직선이 최단거리이고, 빛은 장애물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휘어진 공간이라는 개념이 들어오는 순간, 이전의 상식은 더 이상 절대적 기준이 아닙니다. 모순처럼 보이던 현상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패배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그것을 승리라고 부릅니다. 자기 것을 내려놓고 원수를 사랑하는 삶은 세상 눈에는 어리석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지혜로운 삶인 것입니다. 눈을 떴다는 것은 바로 이 계시의 역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눈을 뜬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여전히 죄에 넘어지고, 부끄러운 생각과 행동에서 자유롭지 못할까요. 어떤 날은 믿음이 있는 사람답게 살다가도, 또 어떤 날은 스스로가 너무 초라하고 위선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 질문 앞에서 좌절했습니다.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한다.” 그는 자신의 사역 말기에 이 고백을 남겼습니다.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눈이 더 밝아졌기 때문에 자신의 죄가 더 선명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의 영은 살아났지만, 우리의 몸은 여전히 ‘죽을 몸’입니다. 이 육신은 아직 죄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죄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죄가 더 이상 달콤하지 않게 되었을 때 구원받기 전의 죄는 달콤했습니다. 경쟁에서 이겼을 때, 남보다 앞섰을 때, 나만 잘되었을 때 우리는 성취감과 쾌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눈을 뜬 이후의 죄는 다릅니다. 여전히 같은 행동을 해도 마음은 불편하고, 양심은 괴롭습니다.
마치 깨끗하게 샤워한 뒤에 다시 땀에 절은 옷을 입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던 옷인데, 이제는 견딜 수 없이 찝찝합니다. 죄는 여전히 같은 모습이지만, 나의 감각이 바뀐 것입니다. 그때 성도는 스스로를 미워하는 대신 은혜 뒤로 숨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연약한 존재였구나.” 이 고백은 절망이 아니라, 은혜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부활의 소망을 더 또렷하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원하신다면 구원받은 성도를 즉시 완전하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고된 싸움을 허락하실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와의 싸움 속에서 우리는 점점 알게 됩니다. 나는 나를 구원할 수 없고, 나를 변화시킬 수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자각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밀어붙입니다. 이 몸을 벗고 새 몸을 입게 될 날을 사모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성도는 죄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통해 더 큰 소망을 붙들게 됩니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더 알기 위해 죄를 지어도 되는 것일까요?” 성경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도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안 짓는 이유는 벌이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집에 입양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율법의 명령이 아니라 신분의 문제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라던 아이가 부유한 가정에 입양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그 아이가 새 집을 낯설어하고, 예전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 집의 사랑과 풍요를 알게 되면, 더 이상 쓰레기 더미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이미 이 땅에서부터 그 유업을 맛봅니다. 평안, 자유, 사랑,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기쁨들은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상속된 선물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종종 이 신분을 잊는다는 데 있습니다. 마치 하늘을 날 수 있는 독수리가 썩은 고기를 뜯어먹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때때로 세상의 가치에 집착하며 삽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너는 내 자녀야.”
눈을 뜬 성도의 목표는 완벽한 도덕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지 않는 삶도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단 하나입니다. 점점 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느리고, 때로는 고통스럽습니다. 평생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반드시 그 길을 지나갑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쉬지 않고 설득하시고, 이끌고, 깨우치시기 때문입니다.
눈을 뜬 사람은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틀거리며 넘어질지라도, 그의 시선은 분명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 나라가 눈을 뜬 자들의 목표지점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눈을 뜬다는 것 - 육신의 눈, 마음의 눈, 그리고 영의 눈 (0) | 2026.01.07 |
|---|---|
| 눈을 뜨는 은혜, 그리고 천천히 보게 되는 믿음 (0) | 2026.01.01 |
|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우리가 서야 할 자리 -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의 이야기 (1) | 2025.12.24 |
| 자유를 오해한 사람들, 자유를 얻은 사람들 (0) | 2025.12.16 |
| 믿는 자의 표지 - 말씀 안에 거하는 삶 (1) | 2025.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