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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눈을 뜬 자의 기도 - 응답을 구하는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28.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 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한복음 9:26~31)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눈을 뜹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묻습니다.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질문도 아닙니다. 이미 정답을 정해 놓고, 자기 확신을 지키기 위한 질문입니다.

그때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이 말은 기도의 본질을 꿰뚫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리에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도를 통해 내 뜻을 관철하려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기도를 너무 쉽게 공식처럼 만듭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받는다.” “간절하면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그러나 성경은 기도를 하나님을 설득하는 기술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간절함의 강도만 보고 움직이신다면이 세상은 오래전에 무너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도 개인의 소원 성취를 가르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 비유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성도는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의 끝에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많은 사람이 기도합니다. 그러나 정작 기도해야 할 것을 기도하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말하는 정욕은 단순한 물질적 욕심이 아닙니다. 야고보가 지적하는 것은 영적 독선입니다. 초대교회 안에는 말씀도 알고, 행위도 반듯하고,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변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왜 저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까?” 야고보는 그 기도를 정면으로 반박해 버립니다. 그건 기도가 아니라 정욕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변하지 않으면서 남만 변하길 요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제외한 채 결과만 요구하는 기도, 그것이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환경을 바꾸는 데 있지 않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기도하는 사람을 바꾸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이 좀 바꿔 주세요.” “하나님, 저 사람 좀 고쳐 주세요.” 이 기도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기도 속에 “주님, 이 상황 속에서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시려 합니까?”라는 질문이 없다면 그 기도는 하나님 나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야고보가 말한 위로부터 난 지혜는 이렇게 드러납니다. 성결함, 화평함, 관용함, 양순함, 긍휼과 선한 열매, 이것이 기도의 열매입니다. 응답 이전에, 기도하는 자의 존재가 달라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자주 묻습니다.
“이 길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러나 그 질문 속에는 종종 계산이 숨어 있습니다. “어느 길이 더 안전합니까?” “어느 선택이 더 잘됩니까?”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결박과 고난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경고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만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올라갑니다. 왜입니까? 그는 안전한 길을 찾은 것이 아니라 어디서든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미래를 맞히는 능력으로 분별되지 않습니다. 순종하겠다는 마음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중언부언을 금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은 겟세마네에서 같은 기도를 반복하셨습니다. 바울도 그랬고, 성도들도 그랬습니다. 중언부언이란 반복 그 자체가 아닙니다. 형식과 횟수로 하나님을 움직이려는 시도, 그것이 중언부언입니다. 절박함 속에서 드리는 반복 기도는 우리를 낮추고 하나님의 크심을 드러냅니다. 그 반복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보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빚으십니다.

야고보는 병든 자를 위해 교회가 함께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질병은 죄로 인해 들어온 사망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나 모든 질병의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병이 낫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그 고통을 함께 지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치유가 일어날 때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서로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품을 때 이미 하나님 나라는 그 자리에 임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기도는 나를 움직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는 나를 십자가 앞으로 데려가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성도의 기도는 더 편안한 삶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십자가의 원리로 살아가도록 훈련받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참된 기도는 마침내 이렇게 고백하게 만듭니다.
“주님,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 고백이 깊어질수록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는 분명하게 세워져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