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 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10)
우리는 너무 익숙한 이야기 앞에서 종종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선한 목자’, ‘양의 문’, ‘풍성한 생명’, 교회에 조금만 다녀도 귀에 닳도록 들은 말들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이미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신 이유, 그 긴박한 상황과 예리한 메시지는 흐릿해집니다.
요한복음 10장은 갑자기 튀어나온 비유가 아닙니다. 이 장은 요한복음 9장의 상처 난 현장에서 시작됩니다. 눈을 뜬 한 사람과, 그를 내쫓은 종교인들 사이의 갈등 한복판에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신십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믿음을 고백하지도 않았습니다. 기도를 부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길가에 앉아 있던,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다가가셨고,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구원에 대한 우리의 모든 오해를 무너뜨립니다. 이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보지도 못했고, 선택하지도 못했고, 결정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눈을 떴습니다. 구원은 언제나 이렇게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가 눈을 뜨자,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규칙’이었고,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체계’였습니다. “안식일에 왜 이런 일을 했느냐?” “이 사람은 죄인이다.” “네가 우리를 가르치려 드느냐?” 결국 그들은 눈을 뜬 사람을 출교시킵니다.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종교 안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아이러니한 장면 위에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의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양의 우리”라는 그림을 꺼내십니다. 우리에게는 목가적인 이미지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 비유는 매우 불편했습니다. 양의 우리는 안전해 보입니다. 높은 담이 있고, 질서가 있고, 규칙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것은, 예수님이 양들을 그 우리 안에 머물게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양들을 불러내십니다. 이 양의 우리는 무엇일까요? 천국일까요? 교회일까요? 아닙니다. 절도와 강도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천국일 수는 없습니다. 이 양의 우리는 율법과 종교 체계, 오늘날로 말하면 인간의 종교적 시스템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고, 안전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공간입니다. 눈을 뜬 소경이 쫓겨난 곳이 어디였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세상’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종교’에서 쫓겨났습니다.
양은 성경에서 늘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양은 약하고, 방향 감각이 없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습니다. 양은 시력이 좋지 않아 앞의 양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따라가다가 길을 잃습니다. 공격할 발톱도, 이빨도 없습니다. 파리 한 마리도 쫓아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양에게 딱 하나의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주인의 음성을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실험을 해보면, 목자의 옷을 입고, 목자의 목소리를 흉내 내도 양들은 따라오지 않습니다. 양은 음성의 ‘내용’이 아니라, 그 음성에 담긴 관계를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른다.” 구원은 지식이 아니라 관계의 반응입니다. 양은 설교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논리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를 부르는 음성을 알아듣는 것입니다.
양의 문 앞에는 문지기가 있습니다. 그의 역할은 단순합니다. 참 목자가 오면 문을 열어 주고, 가짜는 막아냅니다. 신약에서 이 역할을 한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예수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문지기는 성령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언제나 예수를 증언하십니다. 사람을 끌어오지 않고, 체험을 과시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반면, 담을 넘어 들어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절도’와 ‘강도’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은 9장에서 눈을 뜬 사람을 내쫓은 자들, 율법을 들고 사람 위에 군림하던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문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은혜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자기 의, 자기 열심, 자기 정당성으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을 살리지 못했고, 오히려 죽이고, 상처 내고, 쫓아냈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곧 문이다.” 이 말은 위로이면서 동시에 폭탄 선언입니다. 다른 문은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방주에는 문이 하나였습니다. 광야의 성막에도 문은 하나였습니다. 구원의 길은 언제나 하나였습니다. 그 문은 교리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방법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우리는 종종 묻습니다.“나는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는가?” “나는 자격이 있는가?” 그러나 양은 자격으로 문을 통과하지 않습니다. 양은 그저 문을 통과당합니다. 목자가 부르고, 문이 열리고, 양은 그 품 안으로 들어갑니다.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속박에서 풀린 자유를 말합니다. 율법 아래에서 숨 막히던 삶, 정죄와 비교 속에 갇혀 있던 삶에서 이제는 자유롭게 숨 쉬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듯, 한 번 문을 통과한 양은 다시 그 우리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여전히 담 안에서 안전하다는 착각 속에 머물러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 이름을 부르시는 음성에 반응해 문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습니까. 양의 문은 지금도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은 언제나 좁습니다. 당신의 의를 내려놓아야 통과할 수 있고, 당신의 가능성을 포기해야 지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그 풍성함은 소유가 아니라 자유이고, 성공이 아니라 안식이며, 종교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양의 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묻습니다. "나는 누구의 음성을 따라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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