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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2) - 은혜로만 열리는 유일한 출입구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4.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한복음 10:9)

요한복음 10장은 바로 앞선 요한복음 9장의 사건을 해설하는,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한 사람, 그를 둘러싼 바리새인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 계신 예수님, 이 세 인물은 단순한 등장인물이 아니라 구원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비극으로 인식하지도 못했고, 구원을 요청한 적도 없으며, 스스로를 변화시키려는 어떤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말 그대로 구원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존재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가 예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과 선택으로 눈을 뜹니다. 그 과정 어디에도 그의 자격, 결단, 노력은 개입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핵심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가능성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철저한 무능력에서 시작됩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켰고, 제사를 드렸으며, 절기를 철저히 준수했습니다. 그 모든 행위는 스스로를
‘구원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증명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은혜가 아니라 성과였고, 선물이라기보다 보상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본체이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시는 한, 그들의 공로는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소경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이 말은 모욕이 아닙니다. 진단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본다고 착각하는 것이 문제라는 선언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하나의 그림을 제시하십니다. 양의 우리가 있고, 그 안에는 서로 다른 양들이 섞여 있습니다. 참 목자의 양도 있고, 세상에 속한 양도 있습니다. 이 우리는 단순히 유대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모든 종교와 삶의 체계를 상징합니다. 그 안에는 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문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왜 예수님만이 문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유대교, 더 넓게 말해 모든 율법 종교의 원리는 단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지키면 살고, 지키지 못하면 죽는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완전한 율법 준수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만이 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분을 통과하지 않고 담을 넘는 자들, 즉 자신의 행위와 종교적 성취로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자들은 예수님의 표현대로 절도요 강도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모습은 반복됩니다.
“나는 오래 믿었다.” “나는 봉사를 많이 했다.” “나는 교리를 정확히 안다.” 그러나 문은 여전히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외에는 그 어떤 경력도 출입증이 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은 구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 이 동사들은 모두 이미 완료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진행 중인 실험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계획의 실행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많은 오해가 발생합니다. 특히 “미리 아심”이라는 단어를 두고, 하나님이 미래를 미리 보시고 인간의 선택을 예측하셨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알다’라는 단어는 단순한 정보 인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약적 선택과 사랑의 언어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켜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된 사건이라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어느 날 미래를 들여다보다가 아들이 죽는 장면을 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창세전부터 계획된 언약의 중심이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그들은 행위로는 화려했지만, 언약 안에는 없었습니다. 반대로 엘리야 시대의 칠천은 숨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미리 아신 자들”이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은 곧 사랑하심입니다. 조건 없는 선택, 이유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타락의 가능성을 주셨는가? 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로봇이 아니라 관계의 존재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관계는 자유 없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속의 역사 속에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하시기 원하셨습니다. 사랑, 인내, 거룩, 능력, 그리고 은혜, 이 모든 것은 타락과 회복의 과정 속에서만 온전히 드러납니다.

마귀조차도 이 계시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인간의 무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선명히 드러내기 위해.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귀결됩니다. 구원은 인간의 선택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인간의 노력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인간의 성취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나 하나님의 영광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그 길의 입구에는 오직 하나의 문이 서 있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로마서 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