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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말씀 묵상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4) -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10.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한복음 10:9)

우리를 부르시는 목자의 음성

어느 봄날 아침, 양떼를 이끌고 초장으로 나가는 목자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목자는 양우리 문을 열고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릅니다. "메리", "루시", "데이비드"... 신기한 것은 양들이 자기 이름을 알아듣고 목자의 음성에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양들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목자의 음성만을 알아듣고 따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바로 이 장면을 통해 당신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단순히 양을 인도하는 목자라고만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고 선포하십니다. 목자이면서 동시에 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고대 중동 지방의 양우리는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실제 문이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신 목자가 밤이 되면 양우리 입구에 누워서 잠을 잤습니다. 목자의 몸이 곧 문이 되는 것입니다. 양들이 밤중에 빠져나가려면 목자의 몸을 넘어야 하고, 늑대나 도둑이 들어오려 해도 먼저 목자와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목자는 자신의 몸으로 양들을 지키는 살아있는 문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이시며, 동시에 우리를 지키시는 보호자이십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는 우리에게 이를 수 없고, 우리 역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연이 아닌 계획, 즉흥이 아닌 예정 - 창세전에 쓰인 나의 이름

제 친구 중에 입양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자라면서 늘 궁금했다고 합니다. "내 친부모는 누구일까? 왜 나를 버렸을까?"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던 그 친구에게 양부모님이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양부모님은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 무려 5년을 기다렸고, 여러 아이들 중에 그 친구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입양 전부터 아이의 이름을 지어놓고, 방을 꾸며놓고, 옷을 사두고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네가 우리에게 오기 전부터 우리는 너를 사랑했단다. 우리가 너를 선택한 것은 네가 잘생겨서도 아니고, 똑똑해 보여서도 아니야. 그냥 우리는 너를 우리 아이로 원했어. 그것이 전부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우연히 주워진 아이가 아니라, 계획되고 선택되고 기다려진 아이였다는 사실이 그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예정의 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연히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 28절부터 3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에는 다섯 단계가 나옵니다. 미리 아심 → 미리 정하심 → 부르심 → 의롭다 하심 → 영화롭게 하심. 이 순서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영원 속에서 시작되어 시간 속에서 실현되고, 다시 영원으로 완성되는 전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미리 아셨다"는 것의 깊은 의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는 말을 단순히 "하나님이 미래를 미리 보셨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아, 저 사람은 나중에 예수를 믿네. 그러니 구원해야지"라고 결정하셨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단어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깊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부부관계를 뜻합니다. 아모스 3장 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아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만을 특별한 언약 관계 속에서 '아신' 것입니다.

따라서 "미리 아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우리와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맺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예레미야 1장 5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예레미야가 태어나기 전, 심지어 잉태되기 전부터 하나님은 그를 아셨고, 사랑하셨고, 계획하셨습니다. 이것이 "미리 아심"의 의미입니다.

행위가 아닌 은혜, 조건이 아닌 선택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우리를 선택하셨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미래를 보시니 내가 나중에 착하게 살고 열심히 믿을 것을 아시고 나를 선택하셨겠지."

하지만 성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로마서 9장 11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야곱과 에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에서보다 나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제로 성경을 읽어보면 야곱은 사기꾼이고 속이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그것이 전부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도 같은 진리를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이 얼마나 분명한 선언입니까? "영원한 때 전부터" 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우주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지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는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정말 공평하게 우리를 대하신다면, 우리 모두는 지옥에 가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은혜로 일부를 선택하셨습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그들이 마땅히 받을 것을 받는 것이고, 선택받은 자들은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공평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 지옥에 가야 합니다. 우리가 원해야 하는 것은 공평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놀랍게도 그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만세 전에 감춰진 비밀

고린도전서 2장 7절은 더욱 놀라운 진리를 계시합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만세 전에",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셨습니다. 이것은 감춰진 비밀이었습니다. 천사들도 몰랐고, 사탄도 몰랐고, 선지자들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비밀입니다.

하지만 때가 되자 하나님은 이 비밀을 드러내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4~5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창세전에", 또다시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의 선택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양부모가 입양할 아이를 선택할 때 "그냥 우리는 너를 원했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냥 내가 너를 사랑하기로 했어. 그것이 나를 기쁘게 했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세워진 십자가 - 시간을 초월한 구원의 사건

여기서 우리는 더욱 놀라운 진리와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창세전에 이미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 8절을 보십시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이 구절의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창세 때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때부터 녹명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즉, 예수님은 창세 때부터, 정확히는 창세전부터 이미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물론 역사적으로 예수님은 약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은 시간 속의 실제 사건입니다. 하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구속사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십자가는 창세전에 이미 세워진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건축가가 건물을 짓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건축가의 머릿속에서 그 건물은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설계도 위에서 그 건물은 이미 서 있습니다. 실제로 건물이 지어지는 것은 몇 달 혹은 몇 년 후일 수 있지만, 건축가의 계획 속에서 그 건물은 이미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십자가는 이미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효력은 모든 시간에 적용됩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도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아직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영원 속에서는 이미 세워진 십자가의 공로가 그들에게도 적용된 것입니다.

계획하시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갈라디아서 4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때가 차매",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표현입니까?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한 때를 정해놓으셨고, 그 때가 차자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다니엘서 9장에는 유명한 "70이레" 예언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의 정확한 시간표를 보여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때부터 계산해서 정확히 얼마 후에 메시아가 오실 것이며, 그분이 끊어질 것(죽으실 것)이라는 것까지 예언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 예언된 시간에 정확히 오셨습니다.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의 실행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0~12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예언자들이 이 구원을 추구하고 연구하였으며, 그들은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예언하였습니다. 그들은 누구에게, 그리고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알려 주었습니다. 예언자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자기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았고, 그분이 고난을 받으실 것을 알았고, 그 후에 영광을 받으실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지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미래 세대를 위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은 계획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계획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변함없으신 하나님

그런데 세대주의라는 이단 사상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원래 하나님은 유대인들만 구원하려고 예수를 보내셨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부하고 죽여버렸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계획을 바꾸셔서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시작하신 거예요. 이방인들을 구원해서 유대인들을 샘나게 하려는 거죠."

이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플랜 B'를 가동해야 하는 무능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아이고, 내 계획이 실패했네. 어떡하지? 아, 그래! 다른 방법을 써야겠다!"라고 당황하시는 분처럼 묘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로마서 11장 29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야고보서 1장 1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계획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약속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이방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플랜 B'가 아닙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플랜 A'였습니다. 창세전부터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 비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만세 전부터 감춰진 비밀이었다고 말입니다.

미리 정하심 - 수평선으로 둘러싸인 백성

프로호리조: 경계를 정하다

로마서 8장 29절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미리 정하셨다"는 헬라어는 '프로호리조'입니다. 이 단어는 'horizon(수평선)'이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입니다. 수평선은 무엇입니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 경계선입니다. 하늘과 땅(혹은 바다)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프로호리조'는 하나님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들 주위에 수평선을 그으신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내 백성이다"라고 경계를 정하신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로 돌아가 봅시다. 목자는 양우리에서 양들을 끌어냅니다. 그런데 목자는 모든 양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양들만 끌어냅니다.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을 자기 주위로 모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로호리조', 미리 정하심입니다.

언제 정하셨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 이렇게 우리를 정하셨을까요? 우리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을 때? 아닙니다. 창세전에,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 속에서 이미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원과 시간의 차이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 속에 계십니다. 하나님께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지금'만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현재입니다.

C.S. 루이스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한 줄로 그어진 선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그 선 위에 계신 것이 아니라 그 선 전체를 내려다보고 계신다. 마치 우리가 지도를 펼쳐놓고 전체를 한눈에 보듯이,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한눈에 보신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창세전의 선택과 오늘 우리의 구원이 동시적인 사건입니다. 우리에게는 수천 년의 간격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모두 '지금'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의 확신

사도행전 13장 48절은 이 진리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을 반대하고 핍박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자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하나 믿음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설교를 듣고, 같은 환경에서 자라도,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해서? 더 선해서? 더 겸손해서? 아닙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자들이 믿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봅시다. 갈라디아서 1장 15-16절,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극적인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하늘에서 빛이 비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되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이 다메섹에서 갑자기 시작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어머니의 태로부터" 이미 그를 택하시고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어제든, 오늘이든, 십 년 전이든,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여러분을 아셨고, 정하셨고, 때가 되자 부르신 것입니다.

부르심 - 영원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영원과 시간의 교차점

로마서 8장의 구원의 순서를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미리 아심(영원 속)
미리 정하심(영원 속)
부르심 (시간 속)
의롭다 하심(시간 속)
영화롭게 하심(시간과 영원의 경계)

보십시오. 부르심이 정확히 중간에 있습니다. 부르심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영원 속의 사건들(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이 있고, 오른쪽에는 시간 속의 사건들(의롭다 하심, 영화롭게 하심)이 있습니다.

부르심은 영원이 시간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창세전부터 감춰진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현실이 되는 순간입니다.

부르심의 순간

여러분은 언제 부르심을 받으셨습니까? 어떤 분은 극적인 회심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복음이 들렸고, 눈물이 쏟아졌고, "예수님, 제가 죄인입니다. 저를 구원해 주세요"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아주 조용한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고,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정확히 언제부터 믿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극적이든 조용하든,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창세전의 계획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실현된 순간입니다.

복음을 듣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하지만 복음이 '들리는' 것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만 일어납니다. 같은 설교를 듣는데도 어떤 사람의 귀는 열리고 어떤 사람의 귀는 닫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은 자의 귀를 여시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루디아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 루디아가 자기 힘으로 마음을 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녀의 마음을 여신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자유의지는 없는 건가요? 우리는 그냥 로봇인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답은 이렇습니다. 부르심을 받기 전에 우리는 죄의 노예였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죄를 선택했지만, 실제로는 죄의 노예였기 때문에 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마약 중독자가 '자유롭게' 마약을 선택하지만, 실제로는 중독되어 있어서 마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그분은 우리의 의지를 억지로 꺾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진심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억지로 강요되는 은혜가 아니라, 너무나 아름답고 매력적이어서 저항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은혜입니다.

연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반했습니다. 그는 매일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를 보고 싶어하고, 그녀와 함께 있고 싶어합니다. 누가 그를 강제로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항할 수 없이' 그녀에게 끌립니다. 왜요? 그녀가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 복음의 영광스러움이 우리에게 계시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항할 수 없이 그분께 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칭의 - 의롭다 하심의 놀라운 선물

믿음이 들어올 때

부르심을 받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에게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로마서 5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갈라디아서 2장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로마서 3장 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보십시오. 의롭다 하심은 항상 '믿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칭의도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언제 생깁니까? 부르심을 받을 때입니다.

따라서 논리적 순서는 이렇습니다. 부르심 → 믿음 → 칭의. 이 세 가지는 거의 동시에 일어나지만, 논리적으로는 이런 순서입니다.

칭의란 무엇인가?

칭의(稱義)는 '의롭다고 칭한다'는 뜻입니다. 주의하십시오. '의롭게 만든다'가 아니라 '의롭다고 칭한다'입니다.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의로워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분은 평생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의는 완전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의를 우리의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동시에 우리의 죄는 예수님께 전가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 하나님은 그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습니다(고후 5:21).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죄의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 용어로 '전가(imputation)'라고 합니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교환(The Great Exchange)'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옷(죄)을 입으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의)을 입었다."

칭의의 즉시성

칭의는 점진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칭의는 즉각적인 선언입니다. 우리가 믿는 그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90%만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100% 의롭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놀라운 진리입니다. 어제 예수님을 믿은 초신자나, 50년 동안 믿어온 성도나, 칭의의 정도는 똑같습니다. 둘 다 100% 의롭다고 선언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숙도는 다릅니다. 50년 믿은 성도가 더 성숙할 것입니다(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법적 지위는 똑같습니다. 둘 다 완전히 의롭다고 칭함받았습니다.

법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죄인이 재판대에 섰습니다. 증거는 명백합니다. 그는 유죄입니다. 사형 선고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판사가 이렇게 선언합니다. "무죄!"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누군가가 그 사람의 형벌을 대신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우리는 명백히 유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죄"를 선언하십니다. 아니, 더 나아가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성화 - 칭의에 함축된 여정

왜 성화가 빠졌는가?

로마서 8장 30절을 다시 보십시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구원의 순서를 배운 사람이라면 여기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칭의와 영화 사이에 성화가 빠져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전통적인 구원의 순서는 이렇습니다. 부르심 → 거듭남 → 믿음 → 회개 → 칭의 → 성화 → 영화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성화를 건너뛰고 바로 영화로 갑니다. 이것은 실수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28절에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선'의 지점, 즉 영화의 지점에 도달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바로 성화입니다.

다시 말해서, 칭의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성화의 과정을 거쳐 영화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화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성화는 칭의에 함축되어 있다."

성화의 기간

그렇다면 성화는 언제부터 언제까지입니까? 간단합니다. 칭의를 받는 순간부터 영화에 이르는 순간까지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그 순간부터 우리가 죽어서(혹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완전히 변화되는 그 순간까지의 모든 시간이 성화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일생이 성화의 기간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사는 모든 날들이 성화의 날들입니다.

성화에 대한 흔한 오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화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화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얼마나 도덕적인 사람이 되었는가?"
"내가 얼마나 착한 일을 많이 하는가?"
"내가 얼마나 죄를 적게 짓는가?"
"내가 얼마나 경건한 모습을 보이는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화를 '자기 개선 프로젝트'처럼 여깁니다.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자. 더 착하고, 더 친절하고, 더 인내하고,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 물론 이런 것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화의 본질은 아닙니다.

성화의 진정한 의미

성화는 '나'라는 존재가 죽어가는 과정입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자라나는 과정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훌륭합니다. 항상 웃고, 친절하고, 봉사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동기는 이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아. 나는 선천적으로 착해. 나는 성경이 말하는 그런 죄인이 아니야. 나는 내 힘으로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어. 그래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거야."

이 사람은 성화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교만 속에서 자기 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종교적이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여전히 부족합니다. 여전히 실수도 하고, 죄도 짓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주님, 저는 참 죄인입니다. 제 힘으로는 의롭게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저를 의롭다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저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살기를 원합니다. 제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 사람이 성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여전히 부족해 보여도, 그의 내면에서는 '나'가 죽고 '그리스도'가 자라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의 강도

이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예수님 옆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입니다. 그는 평생 강도질을 하며 살았습니다. 살인도 했을 것입니다. 그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최악의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 그는 변했습니다. 그는 자기 삶을 돌아보고 깨달았습니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죽어 마땅하다. 하지만 저 옆에 달린 분은 의로운 분이시다. 그분은 왕이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강도는 성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신뢰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에 의지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는 몇 시간 후 죽었습니다. 그에게는 '선한 행위'를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교회에 출석할 시간도, 헌금할 시간도, 봉사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것이 성화의 본질입니다. 겉모습의 변화가 아니라 내면의 변화,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의 변화입니다.

성화의 기준

그렇다면 성화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얼마나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졌는가?"
"나는 얼마나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는가?"
"나는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가?"
"나는 내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가?"

만약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예"라면, 여러분은 성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여전히 부족해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영화 -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우리의 최종 목적지

로마서 8장 29절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이것이 '영화'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도 같은 진리를 말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이것이 영화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에이콘: 내적 본질의 일치

여기서 '형상'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이콘'입니다. 이 단어는 영어의 'icon(아이콘)'의 어원입니다. 하지만 '에이콘'은 단순히 겉모습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내적 본질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에이콘'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닮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9).

골로새서 1장 15절도 증거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 완벽한 에이콘이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도 그 에이콘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형상,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순종으로의 완성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두 분의 다른 의지를 가지고 계시지만, 그 의지들이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예수님이 아버지께 완전히 순종하시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이것이 완전한 순종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우리도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일치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영화는 언제 완성되는가?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언제 완성될까요? 우리가 죽을 때, 혹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입니다.

요한일서 3장 2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를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그분과 같아질 것입니다. 완전히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영화는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라 순간적인 사건입니다. 나팔 소리가 나는 순간, 우리는 완전히 변화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유혹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죄성과 싸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거룩하게, 완전히 의롭게, 완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다리는 "복된 소망"입니다.

견인 - 끝까지 지켜주시는 은혜

과거 시제의 비밀

로마서 8장 30절을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읽어봅시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셨습니까? 모든 동사가 과거형입니다. "미리 정하셨다", "부르셨다", "의롭다 하셨다", 그리고 "영화롭게 하셨다".

처음 세 개는 이해가 갑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미리 정하셨고, 이미 우리를 부르셨고, 이미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것들은 이미 일어난 일들입니다.

하지만 "영화롭게 하셨다"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아직 영화롭게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죄와 싸우고 있고, 아직 완전하지 않고, 아직 변화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과거형을 사용했을까요?

이것은 '예언적 과거형(prophetic past tense)'이라고 불립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이 너무나 확실해서 마치 이미 일어난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확실합니까?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하나님이 반드시 완성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신다

빌립보서 1장 6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반드시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즉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말입니다.

하나님은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이고, 이 사람은 너무 고집이 세서 안 되겠네. 포기해야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끝내시는 분입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얼마나 확실한 약속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분께 주신 자 중에 단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8-29절에서도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손 안에 있고, 동시에 아버지의 손 안에 있습니다. 이중으로 안전한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 손에서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8장의 장대한 선언

이제 우리는 로마서 8장의 백미, 35절부터 39절에 도달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확신에 찬 구절 중 하나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여기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을 나열합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부정합니다.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그것도 안 돼!"

환난, 곤고, 핍박... 끊을 수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걱정합니다. "내가 너무 힘든 시련을 겪으면 어떡하지? 내가 견디지 못하고 믿음을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바울은 말합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3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기는 것은 우리의 힘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내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결심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즉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기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8-9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바울조차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 고난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떼어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붙입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자기 의지를 더욱 포기하게 되고, 하나님께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사망도 생명도 끊을 수 없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이 둘을 함께 묶은 것이 흥미롭습니다.

사망이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죽음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데려갑니다.
"집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고후 5:8)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왜 언급되었을까요? 생명이 어떻게 우리를 위협할 수 있습니까?

시편 44편 2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시편 기자는 고통스러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살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그를 "종일 죽음에 내어놓으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 이 땅에서 계속 살고 싶은 욕망이 그를 괴롭힙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망과 생명의 열쇠를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8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놓으시면 살아서 충성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신다 해도 충성스럽게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둘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 권세자들, 능력... 끊을 수 없다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능력이나", 이것들은 영적 세력들을 가리킵니다. 특히 악한 영적 세력들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의 진짜 적은 인간이 아니라 악한 영적 세력들입니다. 그들은 강력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참소하고, 유혹하고,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들을 이미 패배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2장 15절,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는 원어로 "포로로 삼아 구경거리로 만드시고"라는 의미입니다. 고대 로마에서 전쟁에서 이기면 적군의 장군들을 포로로 잡아 거리를 행진시켰습니다.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사탄과 그의 군대를 완전히 패배시키시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우리를 참소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패배한 적입니다.

현재 일, 장래 일... 끊을 수 없다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현재 일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어려움들입니다. 건강 문제, 경제적 어려움, 관계의 갈등,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이런 것들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때로는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현재의 어려움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4절을 다시 보십시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중보자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현재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 아래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베드로전서 1장 5절,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장래 일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내가 앞으로 암에 걸리면 어떡하지? 사고를 당하면? 사업이 망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하지만 장래 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래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장래 일이 적힌 책이 나옵니다. 그 책은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어서 아무도 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님이 그 책을 여시고 인을 떼십니다.

즉, 미래도 예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모두 예수님의 주권 아래 일어나는 일입니다.

높음, 깊음... 끊을 수 없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높음은 세상의 권세와 교만을 상징하고, 깊음은 지옥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세상의 가장 높은 권세도, 지옥의 가장 깊은 권세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땅 아래 곳"까지 내려가셨다가 "지극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엡 4:8~9, 빌 2:8~11).

빌립보서 2장 8~11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우주의 모든 존재가 예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높음도, 깊음도, 모두 예수님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다른 아무 피조물도... 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모든 가능성을 차단합니다.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이것은 완전한 포괄입니다. 바울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을까 봐, "다른 아무 것이라도"라고 덧붙인 것입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절대로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열심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내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정하셨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부르실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확실해서, 성경은 마치 이미 일어난 것처럼 과거형으로 말합니다.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따라서 여러분이 지금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든, 어떤 시련 속에 있든, 어떤 실패를 경험했든, 포기하지 마십시오. 자폭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실수해도, 넘어져도, 실패해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끝까지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하나님이 반드시 완성하실 것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은 결코 자기 양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문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안전을 완벽하게 보장하십니다. 그 어떤 것도 절대로 아무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가진 확신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안전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약속을 다시 한번 붙잡으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성공도, 실패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영화의 지점으로 반드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흔들리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지키고 계십니다. 그분의 손 안에서 여러분은 완전히 안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