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29)
어느 봄날, 한 농부가 씨를 뿌렸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길가에도, 돌밭에도, 가시덤불 사이에도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돋아났습니다. 멀리서 보면 모두 같은 싹이었습니다. 같은 햇볕을 받고, 같은 빗물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여름이 지나고 수확의 계절이 왔을 때, 농부는 어떤 싹들은 처음부터 뿌리가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생명처럼 보였지만, 생명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그 핵심은 한 단어에 담겨 있었습니다. "뿌리가 없어." 돌밭과 가시덤불의 씨앗은 진짜 믿음을 가졌다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참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씨름해야 할 질문의 출발점입니다. 목자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중도에 탈락할 수 있는가?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두 손을 펼쳐 보이시듯 선언하십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성도의 견인'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정하심과 택하심에서 시작된 구원은 의롭다 하심을 거쳐 반드시 영화에까지 이른다는 것입니다. 마치 강물이 시작되면 바다에 이르듯,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완성에 이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가 생깁니다. 예정론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들은 불안해합니다. "나는 택함 받은 자인가, 아닌가?" 그러나 예정론은 우리를 불안의 미로 속으로 밀어 넣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예정론은 한 번 택하신 자를 하나님께서 결코 놓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교리입니다. 문제는 그 확신을 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 구절들이 적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1970년대 미국 어느 도시의 교회 이야기입니다. 부흥의 물결 속에서 수백 명이 앞으로 나와 결신했고, 세례를 받았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자 그 중 상당수가 교회를 떠났습니다. 신학적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한때 구원을 받았다가 잃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구원받지 않은 것인가?"
예수님 당시에도 이 질문은 생생하게 살아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충격적인 문장이 나옵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그들이 믿었다고 했는데, 왜 주님은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는가? 그들의 믿음은 구세주를 향한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인정하는 것과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인 것입니다.
6장에서 그 장면은 더 첨예해집니다. "제자들" 중 많은 이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떠나갔습니다. 주님은 이미 그들 가운데 믿지 않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않으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자,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은 자들이 스스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버렸습니다. 쫓겨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처음부터 거기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배교의 실상입니다. 배교는 참 신자가 구원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오늘날과 달랐습니다. 목숨을 건 신앙고백이 요구되었습니다. 요단강에서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나는 이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세상을 향한 선전포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가짜들이 있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서 바울은 예언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디모데후서에 가면 그 예언이 현실이 된 장면이 나옵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라는 자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거짓 가르침을 퍼뜨려 어떤 이들의 믿음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잘 보면 사도 바울은 그들을 즉각 내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그는 심각한 죄를 범한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다"고 표현하는데, 그 이유가 놀랍습니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쫓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징계를 통해 회개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자칫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누군가를 가짜로 정죄하고 끊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그의 태도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요한일서 2장 19절이 답합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그들은 결국 스스로 떠났습니다. 처음부터 그곳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눈에 보이는 교회를 가리켜 "섞여있는 대중"이라고 불렀습니다. 교회가 완전히 정결케 되는 날까지, 그 안에는 진짜와 가짜가 함께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견인 교리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베드로후서 2장을 보십시오.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구원받은 사람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열쇠가 숨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서 참 신자를 가리켜 세상의 "썩어짐"에서 피한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헬라어로 '프흐도라', 즉 본질의 깊은 부패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2장 20절에서 쓰인 단어는 다릅니다. "더러움"으로 번역된 헬라어 '미아스마'는 겉을 더럽히는 외적 오염을 뜻합니다. 진창에 빠진 것처럼 겉이 더러워진 상태입니다.
베드로는 22절에서 속담을 인용합니다.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개는 씻길 수 있습니다. 돼지도 목욕을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씻긴 돼지는 결국 진창으로 돌아갑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도덕적, 종교적 세정(洗淨)으로 잠시 더러움을 피했다가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간 자들, 즉 본질의 변화 없이 겉만 번지르르하게 살아온 가짜 신자들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같은 장 1절의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한다"는 표현도 오해를 받습니다. 여기서 "주"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큐리오스'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는 '데스포테스'입니다. 그리고 "사다"는 구속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음을 표현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베드로는 신명기 32장을 배경으로,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먼저 택해진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거짓 선생들이 나와 멸망에 이를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가 멸망할 수 있다는 말이 전혀 아닌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도 흔히 오해받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이것이 마치 바울도 구원에서 탈락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버림"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도키모스'는 "칭찬받지 못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9장 전체에서 사도와 전도자로서의 직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구원의 상실이 아니라, 사역자로서의 자신의 모든 수고가 결실 없이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제거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면 탈락되는가? 여기서 열매를 도덕적 행위의 양이나 종교적 활동의 빈도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 많은 종교적 열심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참 열매는 행위의 화려함이 아닙니다. 자아가 부인되고 그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진짜로 붙어있는 가지는 억지로 열매를 쥐어짜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습니다. 참 가지는 결국 그리스도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은 원 감람나무에서 꺾인 이스라엘과 접붙임 받은 이방인 가지를 대비합니다. 이것이 택함 받은 자도 탈락할 수 있다는 증거로 인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읽기 전에 로마서 8장 38~39절을 먼저 읽어야 합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것이 로마서 8장의 결론입니다. 그리고 9장부터 바울이 씨름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탈락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바울의 답은 명확합니다.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전체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그들은 구속사의 모델로 사용된 것이지,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도 택한 자들은 남겨져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바울 자신이 그 증거였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1장이 이방인 교회에게 보내는 경고는 이것입니다. 먼저 선택받아 율법과 언약과 예배를 받았던 이스라엘 안에서도 그처럼 많은 가짜들이 있었다면,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하지 말고 자신의 신앙을 진지하게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한 등산가가 험한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안내자가 곳곳에 표지판을 세워두었습니다. "이 길로 가면 절벽이다." "저 돌은 미끄럽다." "폭풍이 오기 전에 대피소로 들어가라." 그 표지판들을 읽으면서 등산가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안내자가 날 죽이려는 건가?" 그러나 표지판들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무사히 정상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경고 구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바울은 권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를 불안의 늪으로 밀어 넣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는 현실에서, 자신이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를 진지하게 살피라는 목자의 심정이 담긴 말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경고 구절들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살아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을, 참 믿음과 잠시적인 믿음을 분별하게 하여 더 진지하고 성실한 신앙의 길로 우리를 이끄는 것입니다. 역사 안에서 그토록 많은 가짜들이 진짜 속에 섞여 결국 찍혀 버린 사실을 기억하고, 자신을 돌아보아 올바른 신앙의 길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군대에 입대하면 놀라운 혜택들이 주어집니다. 신분 문제가 해결되고, 대학 교육이 보장되며, 세금과 이자 혜택이 풍성하게 따라옵니다. 그러나 그 혜택과 함께 국방의 의무라는 막중한 책임도 주어집니다. 혜택만 누리고 의무는 외면하는 자는 군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목자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창세전 택하심에서 시작된 구원,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 그 날까지 맡긴 것을 능히 지키시리라는 확신, 이 모든 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나 완성의 지점까지 가는 여정에는 마땅히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자아 숭배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왕으로 높이는 자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 부인조차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의 열심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자신을 시험하고 확인하며 신앙의 길을 점검하게 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일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의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과 디모데후서 1장 12절의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한다"는 고백은, 우리에게 수동적 안주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확신이 능동적 신뢰와 열심의 근거가 됩니다.
처음 그 봄날, 농부의 밭에는 길가에도, 돌밭에도, 가시덤불 속에도 싹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달랐습니다. 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뿌리 있는 것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일단 부르심을 받은 자는 반드시 완성의 자리로 갑니다. 목자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고,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확신은 나태함의 베개가 아니라 깨어있음의 이유가 됩니다. 자신이 진정 그 손 안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삶, 바로 그 삶을 통해 우리는 성숙의 자리로, 그리고 마침내 완성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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