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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말씀 묵상

목자의 부르심은 취소될 수 있는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18.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한복음 10:9)

어느 겨울날, 어떤 아버지가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아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아들은 사업에 실패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아 아버지의 얼굴조차 볼 수 없다며 잠적해 버린 터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숨어 지낸다는 고시원을 수소문 끝에 찾아냈습니다. 문을 두드리자 한참 만에 아들이 나왔습니다. 초췌한 얼굴로 문틈 사이에서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자격이 없어요. 그냥 가세요." 그러나 아버지는 문을 밀고 들어가 아들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갚을 수 있어서 데리러 온 게 아니야. 그냥 내 아들이니까 온 거야."

이것이 은혜의 얼굴입니다. 자격을 묻지 않고, 조건을 달지 않으며, 상대방의 상태와 무관하게 먼저 찾아와 껴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에 한 가지를 덧붙이려 합니다.
"물론 아버지가 데려가긴 하지만, 앞으로 잘해야 계속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어." 과연 그런가요? 그 순간 아버지의 품은 더 이상 은혜의 품이 아니라 조건부 계약의 공간이 되어버립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됩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롬 3:28)는 선언은 구원의 출발점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로마서 5장은 은혜가 우리 삶에 "왕 노릇" 하여 영생에 이르기까지 이끈다고 증언합니다.

은혜는 문을 열어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문 안으로 우리를 이끌고 들어가 끝까지 붙들어 완성에까지 데려갑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을 받았어도 이후의 행위가 부족하면 그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주장은, 표면상 경건하게 들릴지 몰라도 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인간의 실패가 중단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협력에 기대어 일을 마무리하는 불완전한 신이 됩니다. 은혜와 행위는 물과 기름처럼 본질적으로 섞일 수 없습니다. 은혜에 행위를 조금이라도 보태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 긴장은 첨예하게 존재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배척했습니다. 그리고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 자리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모의했습니다. 두 사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안식일이라는 배경입니다.

율법의 조문을 붙들고 있던 자들이 은혜의 주님께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배척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칸달리조'는 문자적으로 "걸려 넘어지다"를 뜻합니다. 이 단어는 이미 이사야 8장에서 예고된 바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예수님은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그 성취를 이렇게 해설합니다. 의를 좇지 않던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의를 얻었으나, 의의 법을 열심히 좇은 이스라엘은 그 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롬 9:32).

건축 현장을 떠올려 보십시오. 모퉁이 돌은 건물의 기초를 잡아주는 가장 중요한 돌입니다. 그런데 이 돌의 위치와 크기를 미리 계산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벽을 쌓아 올리던 사람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가 아무리 열심히, 아무리 정교하게 벽을 쌓았다 해도, 정작 모퉁이 돌이 제자리에 놓이는 순간 그 벽 전체가 어긋나 버립니다. 자기 행위를 의지하여 구원을 쌓으려 한 이스라엘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게을렀거나 불성실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방향이 틀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는 놀라운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던 그 상황 직후, 성경은 예수님이 그것을
"이상히 여기셨다"고 기록합니다. 여기 쓰인 헬라어 '다우마조'는 단순한 의아함이 아니라 "칭찬하다, 찬탄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거부하는 인간들의 불가능함 앞에서 무력하게 드러나는 그 상황을 오히려 칭찬하셨습니다.

왜 칭찬입니까? 화가가 빈 캔버스 앞에서 기뻐하듯, 하나님은 인간의 완전한 불가능함이 드러나는 바로 그 자리를 기뻐하십니다. 그 빈 자리에만 당신의 은혜를 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2장의 포도원 비유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악한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습니다. 그런데 그 버려진 아들, 그 무력하게 죽임당한 돌이 모퉁이 돌이 되어 자신을 죽인 자들마저 살려내는 구원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막 12:11).
바로 이것이 복음의 역설, 즉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사실인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실패와 무력함이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완전하게 드러나는 무대가 됩니다. 여기에 인간의 행위가 개입할 여지는 처음부터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은 예수님을
"산 돌이요 모퉁이 돌"로 부르며, 구원받은 성도들도 이 살아있는 돌을 따라 살도록 부름받았다고 선언합니다. '산 돌'이 성도의 정체성이라면, '모퉁이 돌'은 그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두 이웃이 오랜 토지 분쟁으로 수십 년째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한 사람이 이사를 왔는데, 그는 의도적으로 양쪽 모두에게 먼저 말을 걸고, 양쪽의 이야기를 번갈아 들으며, 어느 편도 들지 않고 두 사람 사이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이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을 매개로 조금씩 가까워졌고, 마침내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악수를 나눴습니다. 그 새로운 이웃이 바로 모퉁이 돌의 삶을 산 것입니다. 자신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분열된 두 벽을 연결하고 지탱하는 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경쟁과 적대적입니다. 제한된 자원, 제한된 인정, 제한된 안전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위협이 됩니다. 그러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그 구조에서 해방된 존재입니다. 더 이상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밀어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며 다른 이들을 하나로 묶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살아계신 예수님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하고 계신 일이며, 성도는 그 일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부름은 율법적 협박이 아닙니다.
"모퉁이 돌의 삶을 살지 않으면 구원을 취소하겠다"는 엄포가 아니라, "너는 원래 이렇게 살도록 지어진 존재이고, 내가 반드시 너를 그렇게 완성하고야 말 것이다"라는 사랑의 확언입니다. 아직 그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탈락의 신호가 아니라 하나님의 완성 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표시입니다.

한 음악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혀 음악적 재능이 없어 보이는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저 아이는 가망이 없어요." 그러나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것은, 내가 이 아이를 완성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몇 년 후 그 아이는 무대에 섰습니다. 청중은 선생님의 확신이 어디서 나온 것이었는지 그제야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러합니다. 그분이 부르셨다는 것은 그분이 완성하신다는 뜻입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합니다(롬 5:21). 은혜는 구원을 시작하고, 그 과정을 붙들고, 완성까지 이끕니다.

물론 성경 안에는 이 확신에 긴장을 일으키는 듯한 구절들이 적지 않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중도에 떠나는 이들, 용서받은 자가 다시 감옥에 던져지는 비유, 열매 없는 가지는 불에 던져진다는 경고, 히브리서의 준엄한 선언들인 이 말씀들은 은혜의 완전성을 훼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긴장 속에서 은혜의 진지함과 깊이가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처음부터 완성을 품고 있습니다. 그 문을 통해 한번 들어간 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는 약속 안에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부르다가 중간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부르심은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