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한복음 10:3,11)
양을 키우는 목자가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른 새벽, 그는 우리 앞에 서서 양들을 하나씩 불러냅니다. "보리야, 나와라. 흰둥아, 나와라. 점박이야, 나와라." 한 마리도 빠짐없이 이름을 부릅니다. 그것이 선한 목자의 아침입니다.
그런데 잠깐, 이상하지 않습니까. 수십 마리의 양에게 일일이 이름을 붙여준 목자, 그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불러주는 목자, 목자에게 양이란 고기를 얻거나 팔아서 돈을 버는 수단 아닙니까. 그런 존재에게 굳이 이름을 지어줄 필요가 있을까요? 더구나 양이 건강하고 살이 쪄야 수익이 오르고, 마릿수가 많아야 재산이 불어납니다. 중요한 것은 전체의 상태지, 한 마리 한 마리의 이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다릅니다. 그에게 양 한 마리는 결코 숫자가 아닙니다. 이름이 있고, 성격이 있고,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목자의 첫 번째 모습인 것입니다.
어느 날 저녁, 목자가 양 떼를 우리로 몰아넣다가 수를 세어보니 한 마리가 없습니다. 백 마리 중에 한 마리, 남겨진 아흔아홉 마리는 멀쩡히 우리 안에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99퍼센트 성공입니다. 손실률 1퍼센트, 기업이라면 양호한 실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그냥 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떠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한 일처럼 이야기하십니다. 인간의 논리로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아흔아홉을 위험에 방치하고 한 마리를 찾아간다니 말입니다. 그 한 마리가 나머지 아흔아홉보다 특별히 더 가치 있는 것도 아닌데, 예수님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어느 신학자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아버지 쪽으로 할머니가 계셨는데, 형제가 많은 집에서 장남인 큰아버지가 배를 타고 가다 물에 빠진 만년필을 건지려다 그만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할머니는 오랜 세월 동안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셨습니다. 다른 자식들이 제발 기운을 차리시라고 위로할 때마다, 할머니는 언제나 같은 말을 중얼거리셨습니다. "그 아이가 너희들 중에 제일 나았어."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머지 자식들의 가슴이 어떠했을지는 모르지만, 그 말의 진짜 의미는 이것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아이를 향한 사랑이 그만큼 컸다는 것입니다. 나머지가 덜 소중해서가 아니라, 그 하나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 커서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밤새 산을 헤매는 목자 이야기는, 한 마리가 아흔아홉보다 소중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이 당신의 모든 양을 그 잃어버린 한 마리만큼 사랑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신다. 그런데 그 동일한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어떤 신학자는 한 발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만일 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이 나 하나뿐이었다 해도, 하나님은 그 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셨을 것이다." 이것이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신다"는 말씀 한 줄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당신에게 이름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 이름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제 목자가 양들을 불러낸 뒤 어떻게 하는지를 보십시오. 그는 양들 뒤에서 막대기로 엉덩이를 두드리며 몰고 가지 않습니다. 그는 앞에 섭니다. 먼저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양들이 그 뒤를 따릅니다. 헬라어로 '인도하다'에 해당하는 단어 '엑사고'는 "앞에 서서 데리고 가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와 삯꾼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삯꾼은 뒤에서 밉니다. 그래서 위험이 닥치면 달아날 수 있습니다. 양들이 이리에게 물리든 말든, 자신만 살아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앞에 섭니다. 위험이 있다면 자신이 먼저 마주합니다. 그것이 앞서 가는 사람의 숙명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 '앞서 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아주 일찍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2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먼저 보내진 사자, 앞서 가며 길을 여는 존재, 이 사자가 바로 선한 목자의 또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그 앞서 가는 사자의 이야기가 신약에서 세례 요한으로 시작됩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주님의 날 이전에 선지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엘리야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는 사역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세례 요한이 그 자리에 서서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합니다. 세례 요한이 아무리 외쳤다고 해서, 아버지와 자녀의 마음이 실제로 돌이켜질 수 있었을까요? 물로 세례를 주고, 회개를 촉구하고, 심판을 경고하는 것만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죄의 장벽이 무너질 수 있을까요? 세례 요한 자신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 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세례 요한은 서막이었습니다. 그의 삶 전체가 누군가의 예고편이었습니다. 불임의 몸에서 기적적으로 태어나고,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살아가고, 회개를 외치다가 세상의 왕에게 잡혀 죽는 그 삶이, 사실은 예수님의 삶을 미리 그림으로 보여주는 예고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기적적으로 나셨고, 광야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으며, 회개를 외치시다가 세상의 왕에게 잡혀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광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공간입니다. 거기에는 물도 없고 풀도 없습니다. 낮에는 타오르는 태양이, 밤에는 맹수들이 기다립니다. 광야는 생명이 없는 곳, 위험한 곳, 어두운 곳입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이 죄로 얼룩진 세상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광야 같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그 곳, 가면 반드시 고통이 기다리는 그 길에 먼저 발을 내디디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주해야 할 모든 것들을 먼저 당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서 '체휼'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맛을 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것으로 가져갔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그냥 지켜보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당신의 것으로 가져가셨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이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여기서 '질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리'는 "질병, 재난"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질병을, 우리의 재난을, 주님이 가져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병자들을 고치신 사건들이 단순한 기적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설명하면서 이사야의 이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을 때, 그 문둥병이 주님께로 옮겨졌습니다. 혈루병 앓던 여인이 나았을 때, 그 병이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나왔을 때, 그의 죽음이 주님 것이 된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예수를 믿으면 모든 병이 낫고 재난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질병도, 재난도, 죽음도 모두 죄에서 비롯된 사망의 증상들입니다. 주님은 그 근원을, 우리가 영원히 감당해야 했을 그 사망의 뿌리를 십자가에서 당신 몸에 박아 죽이셨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아프고, 넘어지고, 죽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이미 먼저 이 길을 걸어가신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혼자가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이천 년 전 골고다에서 한 번 부어지고 끝난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이 마주하는 모든 고통의 순간에, 주님은 그것을 먼저 겪으신 분으로 당신 곁에 서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 앞서 걷는 선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부활하신 뒤 주님이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가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악소'는 바로 그 '앞서서 인도하며 가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가기 전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 앞에 서서 그들을 인도하며 갈릴리로 가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당신보다 먼저 걷고 계십니다.
이제 선한 목자의 두 번째 특징으로 넘어가 봅시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이것이 대체 왜 선한 것입니까?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어느 한겨울 밤, 목동 하나가 늑대에게 양을 빼앗겼습니다. 그는 빈손으로 늑대를 좇아갔고, 격투 끝에 늑대에게 물려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마 열에 열은 혀를 찰 것입니다. "참, 어리석은 사람이야. 그냥 놔두지, 목숨이 양보다 소중하잖아."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것이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이 '선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 한 문장에 있습니다. 양이 목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 단순해 보이는 문장이 얼마나 혁명적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법칙은 정반대입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부립니다. 위에 있는 자가 아래 있는 자를 이용합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것은 더 많은 사람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입니다. 연구원은 교수를 위해 일하고, 직원은 사장을 위해 일하며, 백성은 왕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이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의 불문율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악하다'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뒤집으십니다. 교수가 학생을 위해 존재하고, 사장이 직원을 위해 일하며, 왕이 백성을 위해 자신을 씁니다.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 존재하고, 선생이 제자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김의 방향이 완전히 거꾸로 뒤집혔습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계신 분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의 신 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했던 그 분이, 실제로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신 들메를 푸셨습니다.
그 장면이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녁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의 두 번째 얼굴입니다. 자신을 낮추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어리석다고 부르고, 하나님은 이것을 선하다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역설이 등장합니다. 앞서 걸으며 양들의 모든 위험을 자신이 먼저 떠안고, 결국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는 선한 목자의 삶이 동시에, 제물이 되어 죽는 어린양의 삶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고도 부르고, 어린양이라고도 부릅니다. 같은 분을 두 이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목자이면서 양인 존재, 이끌면서 동시에 제물이 되는 존재,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은 이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어린양이 광야로 가면 광야로 따라가고, 십자가로 가면 십자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목자를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예배 자리를 채우고 헌금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목자의 삶의 원리, 곧 앞서 걷고, 낮아지고, 상대를 절대적 가치로 대하며, 나를 희생해 그를 섬기는 삶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디도서에서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선한 일에 열심 하는 백성, 곧 선한 목자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을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이름을 불러주신 그 자리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른 새벽,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서서 걷기 시작합니다. 그 걸음이 광야를 지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십자가를 지나, 부활 아침으로 이어집니다.
그 걸음을 따라 걸어간 다윗이 남긴 노래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도망자 시절, 광야를 헤매며 이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쫓기고, 굶주리고, 배신당하면서도 그는 자기 앞서 걷는 분이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쓸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편 23편)
이 고백의 핵심은 목자의 앞서 가심에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다윗은 그 골짜기를 피해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두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입니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주께서 나보다 먼저 그 골짜기를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에 어떤 골짜기가 있습니까. 어떤 광야를 걷고 있습니까. 그 길을 이미 먼저 걸어가신 분이 계십니다. 당신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부르시며, 지금도 당신 앞에서 걸어가고 계신 분이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그 목자를 따라 걷는 것이 우리가 부름 받은 삶인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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