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 10:11~15)
양은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방향 감각이 없어서 한 번 길을 잃으면 스스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천적 앞에서 도망치는 능력도 변변치 않고,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도 합니다. 양치기들은 양은 목자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인간을 가리켜 양이라고 합니다. 처음 그 말을 들으면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모욕이 아닙니다. 오히려 엄청난 선언입니다. 양에게는 반드시 목자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목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 사건 현장을 떠올려 보십시오. 들판 어딘가에 아벨이 쓰러져 있습니다. 형 가인의 손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함께 기쁘게 받으셨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배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죄 없는 목자가 세상의 힘을 가진 자에게 맞아 죽어, 자신이 제물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아벨은 죽었지만 아직도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죄 없는 목자가 스스로 제물이 되어 죽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피 값으로 셋이 태어났고, 그 셋에게는 '씨'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성경에서 '씨'는 예수님과 그 안에서 탄생하는 교회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목자가 제물이 되어 피를 흘리고, 그 피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이 이야기를 우리는 수천 년 뒤 골고다 언덕에서 다시 보게 됩니다. 아벨의 이야기는 죽은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큰 이야기의 서문이었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사랑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14년을 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속에는 훨씬 더 깊은 이야기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갑니다. 상속자의 지위를 뒤로 한 채, 아무런 보장도 없는 타향으로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20년을 보냅니다. 품값은 열 번이나 속임을 당했습니다. 낮에는 타는 듯한 더위 속에서, 밤에는 뼈를 에는 추위 속에서 양 떼를 지켰습니다. 눈 붙일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양들이 낙태하지 않도록 보살폈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양을 잡아먹지 않았습니다. 물려 찢긴 양이 있으면 자기 몫에서 물어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일종의 보험처럼 생각합니다. 믿으면 형통하고,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헌신하면 복이 온다는 방식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그림을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자를 얻기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고, 기꺼이 수모를 견디며, 기꺼이 자신을 낮추는 목자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선한목자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렇게 20년의 수고 끝에 야곱은 신부를 얻습니다. 그리고 그 신부들을 이끌고 아버지의 집을 향해 출발합니다. 오랫동안 정들었던 라반의 집, 익숙하고 안락했던 그 땅을 떠나, 낯설지만 약속된 땅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우리 밖으로 나와 목자를 따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본질을 하나 발견합니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 더 잘 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 불려 나오는 것입니다. 야곱의 신부들이 정든 아비의 집을 떠났듯이,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 세상에 깊이 뿌리박고 눌러앉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한 소년이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형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은 스무 냥이라는, 어린 생명치고는 너무 초라한 값이었습니다. 낯선 땅, 낯선 집, 낯선 언어, 요셉은 거기서도 성실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거짓 고소와 감옥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감옥 안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나 길고 어두웠을지, 우리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요셉은 결국 감옥에서 나와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는 풍년의 7년 동안 양식을 비축해 두었고, 흉년이 들었을 때 애굽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 모두를 먹여 살렸습니다. 그 먹임 안에는 자신을 팔아 버린 형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요셉은 울면서 형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자신이 겪은 모든 배신과 고난과 억울함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앞서 보내신 것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목자가 양들보다 먼저 앞서 가듯이, 요셉이 먼저 그 어두운 길을 걸어 내려간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고난이 혹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가신 분이 계시고, 그분이 이미 그 길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왕궁에서 자란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그는 애굽의 공주 손에서 자랐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애굽의 왕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함을 거절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왕관 대신 지팡이를 들었습니다. 화려한 왕궁 대신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애굽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양들을 단 한 사람도, 단 한 마리의 양도 남기지 않고 끌어냅니다.
광야에서 양들이 배고프다 하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렸고, 목마르다 하면 바위에서 물을 냈습니다. 양들이 길을 잃으면 앞서 걸으며 인도했고, 잘못을 저지르면 막대기로 훈육했습니다. 그 모든 수고가 목자의 일이었습니다.
모세가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던 것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그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도한 양들은 결국 그 땅에 들어갔습니다. 목자는 때때로 자신이 누릴 것을 포기하면서 양들의 길을 열어 줍니다.
소년 다윗은 들판에서 양을 쳤습니다. 어느 날 사자가 나타나 양 한 마리를 물어 갔습니다. 다윗은 사자를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사자의 입에서 양을 빼내고, 사자를 죽였습니다. 곰이 나타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곰의 수염을 잡아 때려눕혔습니다. 이것은 어린 다윗의 용감한 무용담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한목자의 초상화입니다.
우리를 삼키려는 사자가 있을 때, 주님은 그 사자를 쫓아가십니다. 우리를 할퀴려는 곰이 있을 때, 주님은 그 곰의 수염을 잡으십니다. 에스겔서는 그 목자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고, 쫓긴 자를 돌아오게 하고, 상한 자를 싸매어 주고, 병든 자를 강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직후부터 사울 왕에게 쫓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의 권력이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왕이 쓰러지고, 다윗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에스겔은 그보다 400년 뒤에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목자가 되고 그들 중에 왕이 될 것이다." 그 예언은 역사 속의 다윗이 아니라, 다윗을 모형으로 삼아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왕으로 계십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이 어부들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런데 잠깐,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합니다. 낚시에 걸린 물고기는 죽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낚아 올리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성경에서 물은 저주와 심판과 사망을 상징합니다. 죄인들은 그 심판의 물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복음이 그 죄인 앞에 떨어지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은 죄의 폭로입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이 드러나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죄인은 외칩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그 고백이 바로 심판의 물 밖으로 낚여 올라오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물 밖으로 나온 사람에게 쏟아져야 할 저주와 심판이 예수님께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심판을 대신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낚여 올라온 자가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다시는 그 저주의 물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낚아 올리는 일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세 가지 이름으로 부릅니다. 선한목자, 큰 목자, 그리고 목자장입니다.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분입니다. 큰 목자는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목자장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목자장이 있다는 것은, 그 아래 작은 목자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세 번씩이나 물으시고, 세 번씩이나 같은 명령을 반복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베드로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목자를 따르는 모든 양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도 작은 목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아벨은 목자로 살다가 제물로 죽었습니다. 야곱은 신부를 위해 20년의 수고를 감수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받고도 결국 그들을 먹였습니다. 모세는 왕관을 거절하고 광야를 선택했습니다. 다윗은 사자와 곰으로부터 양을 지켰습니다. 이들은 모두 다른 시대, 다른 방식으로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며 다른 사람들을 앞서 나간 목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삶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어느 신학자가 이스라엘의 양 떼를 직접 관찰한 뒤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여러 목자들이 양들을 함께 한 우리에 몰아넣었다가 각자 자기 양 떼를 부를 때, 신기하게도 각각의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만을 정확히 알아듣고 따라갔다고 합니다. 다른 목자의 목소리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듣나니."
우리 안에도 수많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성공하라는 목소리, 더 가지라는 목소리, 네 자신을 먼저 챙기라는 목소리. 그 소음들 속에서 선한목자의 음성은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앞서 가겠다. 내가 먼저 가겠다."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은 결국 따라가게 됩니다. 어디로 가는지 다 알지 못해도,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되어도, 앞서 가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기에 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선한목자를 따라가십시오. 그분이 어디로 인도하시든, 기쁘게 따라가십시오. 그것이 양으로 태어나 목자로 완성되어 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히브리서 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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