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 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요한복음 10:22~42)
12월의 예루살렘은 차가웠습니다. 성전 광장은 저마다 등불을 든 사람들로 넘쳐났고, 하누카의 축제 분위기가 골목마다 번져 있었습니다. 수백 년 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을 더럽혔을 때, 유다 마카비가 그것을 다시 찾아 정화하고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그 날을 기념하는 것이 수전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절기는 단순한 종교행사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용기와 헌신이 하나님의 성소를 회복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그 축제의 한복판에서 예수는 성전의 가장 바깥쪽, 이방인들도 드나드는 솔로몬 행각 근처를 혼자 거닐고 있었습니다.
어떤 장인이 평생을 바쳐 집을 지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기초부터 지붕까지, 나무 한 조각 허투루 쓴 것이 없었습니다. 완성된 집에는 그 장인의 생각과 손길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들이 날, 손님들이 모두 도착해서 가구 배치가 어떻고 벽지 색이 어떻고 마루가 얼마나 반들반들한지를 떠들어댔습니다. 정작 그 집을 설계하고 지은 장인은 현관 밖에 서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채 홀로 서 있었습니다.
성전이 그랬습니다. 성전의 모든 구조는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 피를 뿌리는 제사장,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 하나하나가 오실 분을 가리키는 손짓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손짓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는 대신, 손가락 자체에 매달려 버렸습니다. 정화된 성전을 봉헌하는 날, 성전이 상징하는 모든 것의 실체이신 분이 성전 밖 변두리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이 장면에 겨울이라는 단 두 글자를 덧붙여 놓았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일찍이 탄식했습니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구원의 계절을 놓쳐버린 자들은 겨울에 남겨집니다. 요한이 말하는 겨울은 기온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 실존이었습니다. 자신의 열심과 업적을 들고 성전을 청소하고 봉헌하는 사람들이, 정작 그 성전이 가리키는 분 앞에서는 겨울 속에 서 있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도 이런 아이러니는 반복됩니다. 13세기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웅장한 대성당을 경쟁적으로 지으며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건물을 지었는가보다,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먼저 물으라." 건물을 봉헌하는 열심이 그 건물이 담고자 했던 것을 잊어버리는 일은, 어느 시대에나 일어납니다.
수전절의 유대인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밝히 말하시오." 표적을 보여줘도, 차근차근 설명해줘도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문제는 정보의 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낼 만한 행위와 열심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확신이 눈을 막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돌을 들었을 때, 예수께서는 시편 82편을 인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는 신들이라." 하나님을 대신해 공의를 집행하도록 위임받은 자들이기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재판관들은 뇌물을 받고 악인의 낯을 보아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임받아 철저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역사 안에서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수천 년 이스라엘 역사의 최종 결론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당신만이 아버지의 뜻을 완벽하게 이루시는 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택하신 자녀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가르치고, 권고하고, 징계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표적을 열 번 더 보여준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구원의 여름을 놓쳐버린 자들, 겨울 속에 남겨진 자들을 살려낼 방법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들을 죽여버리고 새롭게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죽일 수는 없으니, 예수께서 그들을 품에 안고 당신이 대신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처음 읽으면 섬뜩합니다. 그러나 "찍어버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콥토'는 단순한 절단이 아닙니다. 제물을 쪼갤 때 쓰는 단어이면서, 언약을 맺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언약을 맺다"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언약을 자르다"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짐승들을 쪼개어 늘어놓은 것, 그리고 하나님만 홀로 그 사이를 지나가신 것이 그것입니다.
이어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소금 역시 제사의 언어입니다. 레위기는 모든 제물에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마가는 '아포콥토'와 '소금'이라는 두 제사·언약 용어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하나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죄와 상관없는 자로 살기를, 손발을 베는 한이 있더라도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일을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베어 버리시고, 그에게 언약의 소금을 부어 참 제물로 받으심으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다시 12월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축제의 등불이 켜진 성전 안,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화하고 봉헌한 그 건물의 아름다움에 흥분해 있었습니다. 성전 밖 솔로몬 행각 가를 거니는 사람 하나를 눈여겨보는 이는 드물었습니다. 그 분은 곧 요단강 저편으로 자리를 옮기실 것이었습니다. 마치 유월절 열흘 전에 따로 분리되어 간직되다 열넷째 날에 잡히는 어린양처럼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요단강 변두리에서, 화려한 축제의 조명과 멀리 떨어진 그 곳에서, 빈손으로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성전을 봉헌할 것이 없는 사람들, 수전절에 내놓을 업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믿었습니다.
생명은 우리 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선한 행위도, 우리의 도덕적 일관성도, 우리의 종교적 열심도 그것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기에, 우리의 실수와 실패와 어리석음이 그것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손발이 찍히고 눈이 뽑히신 예수를 기억하는 자리에서, 빈손으로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 기억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일 때, 우리는 막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은혜가 우리 안에서 왕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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