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 12:1~8)
그 집 안에는 향기가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잔치 자리였습니다. 웃음이 있었고, 음식이 오갔고, 살아난 나사로를 둘러싼 놀라움이 아직 식지 않은 자리였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와 예수와 함께 앉아 있는 장면,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기적이었고,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조용히 앞으로 나왔습니다.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손에는 작은 옥합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옥합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주 짧고도 분명한 소리였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소리였습니다. 그 다음 순간, 향기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향기는 단순히 좋은 냄새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숨을 멈출 정도로 짙고, 깊고, 압도적인 향기였습니다. 그 집 전체가 순식간에 그 향기로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마리아에게로 쏠렸습니다. 그녀는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은 아름다웠다기보다, 오히려 낯설고 당황스러웠습니다. 누군가는 감동했을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한 사람이 입을 열었습니다. “이걸 왜 이렇게 낭비합니까?”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향유는 노동자의 1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그 돈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 말은 합리적이었고, 현실적이었고, 어쩌면 도덕적으로도 옳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 말을 막으셨습니다. “가만 두어라.”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이것은 나의 장사를 위하여 한 것이다.” 그 순간, 그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마리아를 보았습니다. 그녀의 행동을 보았고, 그녀의 낭비를 보았고, 그녀의 감정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전혀 다른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보고 계셨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단순한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어떤 ‘좋은 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예수의 죽음을 말입니다.
몇 해 전,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에 한 중년 여성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홀로 아이 둘을 키우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았고, 늘 빠듯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선교 헌금을 작정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형편에 맞게 헌금을 약정했습니다. 누군가는 넉넉히 했고,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적었습니다.
그 여성도 조용히 종이에 금액을 적었습니다. 그녀가 적은 금액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꽤 큰 액수였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조금 줄이셔도 될 것 같아요. 생활도 있으신데…” 그녀는 잠시 웃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사실 이건 돈을 내는 게 아니라… 제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 같아서요.” 그 말은 듣는 사람을 잠시 멈칫하게 했습니다. 그녀는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헌신을 “내가 가진 것을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을 드리고, 돈을 드리고, 재능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드릴수록 더 큰 헌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합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 향유는 단지 그 표현이었을 뿐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자신의 영광이었던 머리카락으로 가장 낮은 자리, 예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것은 선언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나를 붙잡고 살지 않겠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왜 불편했을까요? 왜 그들은 마리아를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들은 아직 “죽음”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여전히 살아서 무언가를 해주어야 할 존재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대를 이루어 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고, 더 나은 삶을 만들어 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살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죽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죽음이야말로 자신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향유는 장례식에 쓰이는 것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붓는 것이 아니라, 곧 죽게 될 사람에게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살아 있는 예수에게 그것을 부었습니다. 왜그랬을까요? 그녀는 이미 예수의 죽음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아직 제자들조차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마리아는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잘 살게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음은 “죽는 이야기”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죽음에 내가 함께 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나사로가 그랬던 것처럼 그 죽음 안에서만 살아납니다. 죽었던 자가 살아나, 예수와 함께 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계산합니다. 이건 낭비가 아닌가? 이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이건 비효율적인 게 아닌가? 그 질문들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질문들만으로는 마리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계산이 아니라 복음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집 안에는 여전히 향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향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향기를 맡으며 그날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복음이 전해질 때마다 그 이야기는 함께 전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향기는 단순한 향기가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한 사람이 자신을 내려놓은 이야기의 향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그 방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 하나일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계산하고 있고, 누군가는 여전히 판단하고 있고, 누군가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조용히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자신을 깨뜨렸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그런 순간이 올 것입니다. 무언가를 드리는 순간이 아니라, 내가 사라지는 순간, 그때 비로소, 향기가 퍼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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