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한복음 12:20~25)
봄이 되면 농부는 손에 쥔 씨앗을 바라봅니다. 작고 단단한 그 알갱이 하나가 땅속에서 무슨 일을 겪어야 하는지 그는 압니다. 껍질이 터지고, 속살이 물러지고, 형체가 무너져야 합니다. 그 죽음의 과정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싹이 올라옵니다. 농부는 그것을 알기에 아까운 마음을 접고 씨앗을 땅에 묻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시면서 바로 이 장면을 가져오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주로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잠깐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처럼 우리도 밀알이 되어 희생합시다."
헌신을 독려하는 자리, 선교를 권유하는 자리, 봉사를 강조하는 자리에서 이 말씀은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나쁜 교훈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오직 그 용도로만 소비될 때, 우리는 이 말씀이 본래 담고 있던 복음의 메시지를 놓쳐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에게 헌신을 요구하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그 죽음이 무엇을 이루는지를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유월절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각지에서 몰려온 순례자들로 가득했습니다. 그 인파 속에 헬라인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 빌립을 찾아가 조심스럽게 청합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헬라인들의 그 짧은 청원에 요한은 왜 이렇게 공을 들여 기록을 남겼을까요? 이것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선민이라 불렀고, 이방인을 개에 비유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유대인들이 예수를 버리려는 바로 그 순간에, 이방인인 헬라인들이 찾아와 예수를 만나게 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닙니다. 구속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선언적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민족은 처음부터 하나의 모형이었습니다. 율법을 받고,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 살면서도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해 온 모형입니다. 그 불가능의 증명이 완성되는 지점에서, 이제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과 헬라인의 경계를 넘어 모든 족속에게 실행될 때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던 그날 이미 이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 이스라엘의 실패가 하나님의 계획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가 처음부터 이 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헬라인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요한복음의 한 장면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런데 그날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때가 되지 않았는데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예고편이었습니다. 최종적인 영광이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를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에서 "때가 왔다"는 선언이 터져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영광, 헬라어로 '독사'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되심이 밖으로 드러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영광이라고 하십니다. 십자가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은혜와 용서와 오래 참으심이 한꺼번에 농축되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착각합니다. 웅장한 예배당을 짓거나, 화려한 찬양을 올리거나, 많은 헌금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심으로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는 그 사건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는 유일한 길도 결국 같습니다.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왕 되심을 삶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보여주신 상징을 다시 들여다보십시오. 정결예식을 위한 돌항아리가 여섯 개였는데,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율법을 목숨처럼 지킨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의 종교적 열심이 실은 속이 텅 빈 외식이었음을 폭로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그 빈 항아리를 물로 채우시고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숫자는 일곱인데 항아리는 여섯이었습니다. 그 마지막 일곱 번째 항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율법이라는 물이 그리스도의 피라는 포도주로 완성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그 영광이 이제 골고다에서 실제로 펼쳐질 때가 된 것입니다.
이제 한 알의 밀알 말씀의 본래 의미로 들어가겠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18~23)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이 비유를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길가 밭인가, 돌밭인가, 가시떨기 밭인가, 아니면 좋은 땅인가?' 그리고 좋은 땅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려던 것이 과연 "좋은 밭이 되자"는 권고였을까요?
비유를 설명해 주시기 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그리고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십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 마음 밭을 기경하여 좋은 땅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했겠습니까? 채찍 하나 들고 우리의 마음 밭을 갈도록 독려하시면 될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사야서 6장 13절은 이 불가능함의 선언 한가운데서 돌연 한 희망을 제시합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황폐한 땅에서 열매를 맺어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 그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거룩한 씨입니다.
여기서 '거룩한 씨'의 히브리어 '제라'는 창세기 3장에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인의 후손',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자손'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은 그 자손이 누구인지를 못 박듯이 확정합니다.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그 씨는 말씀이라 하셨고,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비유의 핵심은 결국 이것입니다. 길가 밭이든, 돌밭이든, 가시떨기 밭이든, 그 황폐한 땅에 하나님이 직접 거룩한 씨를 심으시고, 그 씨로 하여금 기어이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좋은 밭이 되라는 권고가 아니라, 좋은 밭만이 맺을 수 있는 열매를 황폐한 땅에서 맺어내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사실 씨앗에 관한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거꾸로 들립니다. 죽은 씨는 싹을 틔우지 못합니다. 살아있는 씨가 열매를 맺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왜 주님은 씨가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을까요? 씨앗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답이 보입니다.
씨앗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바깥의 껍질, 그 안쪽의 씨젖, 그리고 씨젖 위편에 자리한 작은 씨눈. 쌀로 치면 우리가 밥으로 먹는 하얀 부분이 씨젖이고, 쌀을 너무 세게 씻으면 떨어져 나간다는 그 작은 부분이 씨눈입니다.
씨눈이 살아있는 씨앗이 땅에 심기면, 껍질과 씨젖은 분해되어 씨눈의 양분이 됩니다. 껍질과 씨젖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입니다. 그 죽음을 통해 씨눈이 살아나고, 싹이 트고, 마침내 열매가 맺힙니다. 반대로 씨눈이 이미 죽어있는 씨는 아무리 좋은 땅에 심어도 절대로 싹을 틔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구조를 인간에게 적용하십니다. 인간도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씨눈이 대지와 교통하며 생명력을 받아들이듯, 영이 살아있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력을 공급받아 열매 맺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씨젖과 껍질, 곧 육신의 옛 사람을 부인하는 것을 양분으로 삼아 맺혀집니다. 그 부인의 과정이 이 세상에서는 죽는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주님은 씨가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그 그림이었습니다. 씨눈이 온전히 살아계셨던 예수님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들이 그 안에서 함께 죽고, 영생이라는 열매가 맺혀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헌신을 요구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오직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너희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밀알이 되어 죽는 방법 외에는 없다."
우리는 결코 잘한 것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좋은 밭이 되었기 때문에 영생이라는 열매가 맺힌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은 이것을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경건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저 받았을 뿐입니다.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출애굽의 기적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눈앞에 바다가 막히고 뒤로 애굽 군대의 발소리가 들려오자, 그들은 곧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아우성쳤습니다. 전형적인 돌밭이고 가시떨기 밭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밭을 갈아엎으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나님이 직접 열매를 맺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들입니다. 지금 육신적으로도 우리는 여전히 좋은 밭이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3장이 묘사하는 그 모습,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교만하고, 감사치 않고,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그 모습이 아직도 우리 안에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라는 거룩한 씨가 맺으신 열매이기에, 우리는 좋은 밭이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우리는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됩니까?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그렇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거룩한 씨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호두가 발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그 단단하고 두꺼운 호두 껍질이 안에서부터 박살납니다. 씨눈이 싹을 틔우기 위해 그 딱딱한 껍질을 뚫고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거룩한 씨도 그렇습니다. 그 씨는 우리의 옛 자아라는 껍질을 부수고, 자기를 사랑하고 쾌락을 탐하는 씨젖을 양분 삼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 냅니다.
이 과정은 강요나 의무감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 스스로를 결심하지 않듯이, 거룩한 씨에 의해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열매는 세상에서 약자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용서하는 모습, 섬기는 모습, 인내하는 모습, 손해를 감수하는 모습. 세상의 눈으로 보면 지는 것이지만, 그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옛 자아에 대한 부인 없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씨는 그렇게 무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자기 부인은 이웃 사랑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서 이웃을 경쟁자로, 위협으로 봅니다. 그러나 거룩한 씨가 옛 사람을 부인해 나갈 때, 조금씩 공간이 생겨납니다. 나를 공격하는 세상조차 품을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납니다.
2세기 초에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디오게네투스'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그 편지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영혼이 육체를 사랑하면서도 육체에게 미움을 받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합니다. 마치 감옥에 갇힌 듯 세상에 억류되어 있으면서도, 가슴으로 세상을 품습니다." 거룩한 씨가 열매를 맺은 사람들의 모습이 이런 것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철학의 역사는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어쩌면 그것은 천국 망각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죽은 뒤에 가는 어딘가로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죽기 전까지 잘 믿어야 갈 수 있는 상급의 장소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은 죽은 밀알이 있는 바로 그곳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 한 사람이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용서할 때, 갚을 길 없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 때, 인정받지 못하는 자리에서 묵묵히 섬길 때, 자기 몫을 주장하지 않고 뒤로 물러설 때, 그 자리에 천국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강요된 희생이 아닙니다. 안에 심겨진 씨의 필연적인 열매 맺음입니다.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에게 헌신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결코 스스로 이를 수 없는 구원을 위해, 당신이 직접 그 밀알이 되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으로 우리 안에 심겨진 거룩한 씨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봄날 농부가 손에 쥔 씨앗을 바라보듯,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이 거칠고 황폐한 밭에 심어진 작은 씨앗 하나가, 어떤 열매를 맺어낼지를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 씨앗은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죽음을 통해, 살아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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