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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말씀 묵상

왜 하나님은 빛을 숨기셨는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13.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하시고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요한복음 12:36)

어느 날 한 남자가 병원을 찾았습니다. 수년째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는 증세가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인터넷을 검색하고 약국에서 소화제며 영양제를 사 먹으며 버텼습니다.
"나는 내 몸을 내가 가장 잘 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검사 결과를 받아든 의사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 상태로는 약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남자는 어리둥절했습니다. 고쳐주러 왔더니 왜 약을 못 주겠다는 겁니까? 의사가 설명했습니다. "지금 당신 심장 주변에 염증이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일반적인 강심제를 쓰면 오히려 심장이 더 빠르게 망가집니다. 먼저 염증을 치료해야 합니다." 남자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자기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약이, 지금의 자기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오늘 본문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2장 후반부는 극적인 사건도, 화려한 기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단락에는 복음의 가장 깊은 뿌리가 드러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그런데 그 말씀을 마치시자마자, 36절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사라져버리십니다. 성경은 그것을 '숨으시니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
숨으시니라'로 번역된 크뤼베는 수동태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숨으신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분을 숨기신 것입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 아버지께서 생명의 빛이신 아들을 사람들로부터 숨겨버리셨습니다. 믿으라 해놓고 숨겨버리시다니,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수수께끼를 풀려면 창세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직후, 하나님은 이상한 행동을 하십니다. 에덴동산 한가운데 있던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화염검과 그룹들로 막아버리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이것도 처음엔 이상하게 보입니다. 고쳐주실 수 있는데 왜 길을 막으십니까?

그런데 이 생명나무 실과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영생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신 예수를 먹으면 영생합니다. 창세기의 생명나무 실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막으신 것은 무엇입니까? 죄를 지은 상태의 아담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병원 이야기에서 의사가 약을 주지 않은 것은 환자를 미워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상태로 그 약을 복용하면 오히려 더 위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염증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사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신 것도 그와 같습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인 인간이 스스로 선악의 판단자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는 뜻입니다. 그 독립 선언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그 죄인의 상태 그대로, 그 독립심과 자기 주장을 그대로 품은 채로 생명나무 열매를 먹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한 아이를 상상해 보십시오. 아버지의 재산을 다 가로채어 집을 뛰쳐나간 탕자가, 멀리 외국에서 방탕하게 살면서도 자기 주소지를 아버지 집으로 등록해 두고 복지 혜택만 꼬박꼬박 챙겨가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를 배반한 채로 아버지의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계의 회복이 아니라 착취입니다.

죄인이 죄의 상태 그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바로 그런 모양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부려먹는 것, 하나님을 인생 도우미로 이용하는 것, 그러한 상태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오"라고 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룩한 이름을 자신의 욕망에 붙이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처음부터 막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까지 빛을 숨기십니까?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6장을 인용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의 불가능함을 처절하게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사야를 불러 보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이상합니다.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왜 못 알아듣게 하라고 하십니까? 이사야가 묻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그때 하나님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

여기서 '
황폐한 땅'은 히브리어로 '티끌, 광야'를 의미합니다.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에서 '많다'는 단어는 '충분한, 넘치는'이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이 티끌이며 광야에 불과한 존재임이 충분히, 넘치도록 폭로될 때까지, 그때까지 하나님은 생명의 빛을 숨기신다는 것입니다.

그 충분한 폭로가 언제 일어납니까?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인간 스스로가 십자가에서 꺼버렸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죽이는 것, 그보다 더 완전한 인간의 불가능함의 증명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그러나 거룩한 씨가 그루터기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가능성이 완전히 소진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복음서에서 그 숨겨진 빛이 공개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는 그 순간,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집니다. 그 휘장에는 그룹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고 있던 바로 그 그룹들이 새겨진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감추어두셨던 생명의 빛, 지성소의 임재가 열린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열 수 없었던 그 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 9:39~41) 십자가 앞에 서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 우리는 생명나무를 먹었다"고 했던 바리새인들, 그들이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숨겨두신 빛을 은혜 없이 스스로 보았다고 주장하는 자는, 사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반전을 만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충분히 자신을 부인하고, 충분히 회개하고, 충분히 낮아지면, 그때 하나님이 그 생명나무를 내게 허락하시겠구나.' 그러나 그것도 여전히 인간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생각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 역시 우리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창세기에서 막혔던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위치가 놀랍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곧 어린양의 신부인 하나님의 교회 한가운데에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우리가 찾아가서 따먹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그 생명나무를 심어버리신 것입니다.

어느 어머니가 편식이 심한 아이에게 채소를 먹이려 합니다. 아이는 싫다고 입을 꾹 다뭅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합니까? 억지로 먹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 채소를 갈아서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 안에 넣어버립니다. 아이가 모르는 사이에 그 영양분이 아이 안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그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찾아갈 수 없으니, 하나님이 몸소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나무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생명수의 강, 곧 성령에 의해 열매를 맺습니다. 성부·성자·성령, 삼위 하나님의 역사로 열리는 이 열매에 우리의 노력이나 결단이나 깨달음이 개입할 자리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그토록 강조한 것이 이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다면 내 안에 생명나무가 심겼다는 것이 어떻게 드러납니까? 영생(오람 하야이)은 히브리어로 단순히 오랜 시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
숨겨진 삶', 이 세상의 것과 전혀 다른 신적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 신적 생명이 우리 안에 흘러넘칠 때, 그것은 사랑·인내·용서·섬김·온유와 같은 열매로 맺힙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밖으로 드러나려면 먼저 ''가 비워져야 합니다. 내 욕망, 내 자랑, 내 두려움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내어주어야 예수의 성품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심긴 생명나무로 인해 열매가 맺히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역설적이게도, '
'라는 옛 사람이 자꾸 죽어가는 것으로만 보여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스스로 결단하고 노력해서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6장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반드시 황폐한 상태로 만드시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편에서 먼저 자신을 비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도 자기를 주장하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
'가 자꾸 실패하고 꺾이는 과정 속에서, 우리 안에 심기신 생명나무가 조용히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부인에서 실패할 때조차, 그 실패를 통하여 우리 안의 예수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없이는 단 일 초도 설 수 없는 티끌입니다. 그 사실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해방합니다.

오늘 본문 42~43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요한은 그들이 '믿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실상을 보면, 그들은 출회가 두려워 입을 열지도 못하고,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요한이 그들을 '믿었다'고 쓴 것은, 그들이 스스로 믿는다고 확신하면서도 실상은 전혀 다른 것을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지방 도시에 크고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주일마다 넘쳐나는 성도들, 화려한 찬양팀, 감동적인 설교, 그런데 그 교회의 진짜 관심이 무엇인지는 헌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담임목사의 권위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교회의 명성이 어떻게 관리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의 관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예수를 자신들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은 영원한 저주 아래 떨어지는 자들의 첫 번째 특징으로 '
두려워하는 자들'을 꼽습니다. 세상이 두려워 자신의 믿음을 숨기는 자,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뒤로 밀어두는 자, 그들은 생명나무 실과를 먹었다고 착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빈 그릇이 되어가는 훈련입니다. 이것도 우리 스스로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심기신 생명나무, 성령의 강으로 열매 맺는 그 생명나무가 우리를 조금씩 비워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비워가심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전날 밤,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우리의 영광도 그 길 위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나타나는 성도의 영광은 섬겨주는 것, 용서해 주는 것, 참아주는 것, 바보처럼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입성하는 그날, 그 모든 비움의 자리에 하나님의 것이 폭포수처럼 채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빛을 숨기셨습니까? 우리 힘으로는 절대 그 빛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달려가도, 아무리 종교적 열심을 다해도, 자기를 주장하는 옛 아담의 상태로는 생명나무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 불가능함이 완전히 폭로되어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빛을 숨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언이 끝난 자리에서, 인간의 가능성이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소진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몸소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 빛을 심어버리셨습니다. 우리는 빛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빛이 우리 안에 찾아오신 사람들입니다. 그 빛이 심겨진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부려먹으려는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조금씩, 때로는 고통스럽게, 그 '
'라는 것이 비워지고, 그 자리에 예수의 성품이 차오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없이는 단 일 초도 설 수 없는 티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고백이, 생명나무가 우리 안에 심겨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