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요한복음 12:15)
어느 날 오후, 한 소년이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왕은 어떻게 생겼어요?" 할아버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말했습니다. "왕은 크고 하얀 말을 타지, 갑옷을 입고, 깃발을 앞세우고,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거야."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 언젠가 그 왕이 우리를 구해주러 오겠네요?"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우리가 왕에 대해 품는 상상은 언제나 그런 식입니다. 강하고, 화려하고, 압도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2천 년 전 예루살렘 성문 앞에 모여든 수백만의 군중 앞에 나타난 왕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새끼 나귀를 타고 있었습니다. 어른이 새끼 나귀를 타면 두 발이 거의 땅에 끌립니다. 왕의 입성이라기보다는 동네 아저씨가 어린 조랑말에 얹혀 들어오는 것에 가까운 풍경이었습니다. 그 앞에서 군중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보는 것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 사이에는, 우주만큼의 간격이 있었습니다.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유대 사가 요세푸스는 그 수가 270만 명에 달했다고 기록합니다.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심지어 로마 제국 곳곳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들끓었습니다. 거기에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냈다는 소문이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직접 목격한 이들도 그 무리 속에 섞여 있었습니다. 분위기는 폭발 직전이었습니다.
"호산나"는 히브리어 '호쉬아나', 곧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시편 118편 25절에 등장하는 이 단어는 원래 죄와 사망 앞에서 터져 나오는 절박한 부르짖음입니다. 성경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스스로를 채울 수 없어서 타인을 경쟁자로 여기고 빼앗으며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라는 요한일서 3장 15절의 선언은, 우리가 모두 도피성이 필요한 자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호산나"란 본래 이런 고백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스스로는 이 지긋지긋한 죄와 사망에서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방법을 강구해 주십시오." 그러나 군중의 호산나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가난에서, 질병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외침은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현실의 역전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 심리의 뿌리는 2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박해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성전 지성소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제물은 유대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로 드리게 했습니다. 안식일과 할례와 절기를 폐지하고 성경을 금서로 만들었습니다. 성전을 매춘 굴로 바꾸어 버렸고, 그 중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이 극한의 어둠 속에서 한 노제사장 맛다디아의 셋째 아들 유다가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는 하시딤이라 불리는 경건주의자들과 함께 게릴라전을 펼쳐 3년 만에 시리아 군을 몰아내었습니다. "망치"라는 뜻의 별명 '마카비'로 불린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스몬 왕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내분과 외세의 공격으로 지리멸렬했고, 꿈꾸던 다윗 왕국의 영광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시 기다렸습니다. 유다 마카비처럼 강하고, 그보다 더 강한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 오랜 기다림 위에 지금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빵을 만들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 그분이라면, 로마쯤은 거뜬히 물리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호산나는 사실상 이런 뜻이었습니다. "예수님, 우리를 왕으로 만들어 주소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주소서."
예수님은 그 기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그 기대와 반대되는 방식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백마가 아닌 새끼 나귀 위에 앉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즉흥적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스가랴는 5백 년 전에 이미 이 장면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예언은 선명합니다. 메시아가 나귀를 타고 오시는 목적이 바로 이스라엘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에브라임과 예루살렘, 곧 이스라엘이 기대는 병거와 활과 말을 끊어버리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유대주의의 뿌리를 뽑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왕들에게 말과 은금과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명하신 것은 단순한 도덕 규율이 아니었습니다(신 17:16). 그것은 신학적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힘의 원천은 말과 병거와 은금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시 33:16~17).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이 선언의 살아있는 표현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 세상의 힘을 동원하여 구원하시는 분이라면, 예수님은 백마를 타셨어야 하고 이스라엘의 무기를 더 강력한 것으로 바꾸어 주셨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오셔서 이스라엘의 무장을 해제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십니다.
어떤 회사의 대표가 신입사원 시절, 상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자네가 쓸모 있으려면 먼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진짜로 알아야 해." 처음에는 그 말이 모욕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후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 말이 내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내가 비어있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비로소 진짜 배움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비워질 때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내가 약해질 때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납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
그런데 나귀 이야기는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야곱은 죽음의 자리에서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기며 유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창 49:11).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고 옷을 포도즙에 빤다는 예언입니다. NIV인 새로운 국제판 성경은 포도즙을 포도의 피로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메시아는 포도의 피에 자신의 옷을 빠는 이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 "나는 포도나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메시아는 포도나무이신 당신 자신의 피로 당신의 옷을 적시는 이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사복음서에 공히 기록된 입성 장면에 등장하는 나귀는 모두 매여 있는 나귀입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께 묶여 있는 나귀, 그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자신의 옷을 붉게 물들이는 십자가를 향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피 묻은 저주의 옷은 모두 당신이 받으시고, 아버지의 백성들에게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의 장면이 겹쳐 보입니다. 백마를 타고 피 뿌린 옷을 입으신 예수님 뒤를 희고 깨끗한 세마포 차림의 하늘 군대가 따릅니다. 앞장선 예수님이 모든 저주와 심판을 온몸으로 받아내어 당신의 옷을 피로 물드심으로, 뒤따르는 성도들의 옷이 희고 깨끗해진 것입니다. 원래 그 피 뿌린 옷은 우리가 입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63장이 묘사하는 것처럼, 우리가 포도즙 틀 속에서 짓밟혀 피를 튀기며 죽어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자리로 내려가 당신 자신을 밟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스바냐는 노래합니다.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습 3:15). 오늘 본문의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는 선언이 바로 이 노래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의 형벌이 제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나귀를 타고 오셨어야 했습니다.
몇 해 전 개봉된 영화 〈바보〉를 기억하십니까? 정신지체아로 태어난 주인공이 평생을 바보처럼 동생과 이웃을 위해 희생만 하다가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비워주고 조용히 죽어가는 이야기입니다. 관객들은 그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흔하다면 흔한 이야기가 왜 그토록 마음을 흔들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그 안에서 세상이 조롱하는 방식의 삶이 얼마나 강렬한 힘을 품고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힘의 이름이 십자가입니다.
윌 스미스의 영화 〈세븐 파운즈〉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모든 것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마지막에는 심장과 눈까지 내어주고 죽어갑니다. 그 장면 앞에서 많은 이들이 나지막이 고백했습니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그 고백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자기를 비워 타인을 채우는 삶, 그 삶이 품고 있는 기이한 아름다움과 힘에 우리 영혼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우리 안에 새겨 두신 그 감각이, 십자가의 언어 앞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귀 타신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날 때부터 허름한 사관의 구유를 택하셨고, 가난한 목수의 집에서 자라셨습니다. 겉모양조차 시원치 않아 사람들이 눈을 돌릴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세상의 힘에 맞아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삶을 기뻐 받으셨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분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고 오른손으로 높이 드셨습니다(행 2:33).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볼멘소리를 합니다. "하나님, 창피하게 새끼 나귀가 뭡니까. 폼 나게 백마 한 마리 보내 주시면 제가 그걸 타고 하나님 일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새끼 나귀만 보내십니다. 직장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하는 상황, 내 능력과 노력이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들, 우리는 그것들이 달갑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새끼 나귀들이야말로 하나님이 당신의 성도에게 보내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새끼 나귀를 타고 있을 때, 우리 안에 계신 나귀 타신 예수님의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은혜의 때에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백마를 타고 오셨다면 이 세상은 거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백마를 타신 예수님은 심판의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곧 그분이 백마를 타고 다시 오실 것이고, 그때에는 이 세상의 모든 권세가 불 못으로 던져질 것입니다.
그런데 두렵고도 놀라운 것은, 지금 우리 성도들이 그 백마 타신 주님에 의해 멸망당해야 할 옛 사람을 아직 안에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지금 당장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 역시 큰일 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이 은혜의 시간 동안, 우리 안의 옛 사람을 미리 공격하고 계십니다. 종말에 있을 백마 타신 예수님의 심판 전쟁이, 이미 지금 우리 삶 안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꾀, 우리가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쌓아 올린 아담적 열매들을 하나하나 쳐 내시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지고 싶지 않은데 져줘야 하고, 인정받고 싶은데 낮아져야 하고, 강하고 싶은데 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바보처럼 사랑하고, 바보처럼 섬기고, 바보처럼 참아주고, 바보처럼 용서하게 됩니다.
만일 지금 자신의 삶 속에서 죄를 향한 예수님의 전쟁이 전혀 일어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오히려 걱정할 일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옛 자아와 씨름하고, 자꾸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의 마지막 장면은 묘한 역설로 끝납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절망 섞인 목소리로 말합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그들은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불평을 예언으로 바꾸어 버리셨습니다.
시편 2편 8절,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입을 통해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우스꽝스러운 예수님에 의해 온 세상이 정복당할 것임을, 가장 격렬하게 예수님을 반대하던 바리새인들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2편은 이 장면의 배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귀를 타고 오시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합니다. 저 연약한 존재쯤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보고 비웃으십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이 철장으로 그들을 질그릇처럼 부수어 버리십니다. 약함이 강함을 파하는 형국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문법입니다. 세상은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이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깁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강함을 품은 약함이 인간의 강함을 이깁니다. 나귀 타신 예수님이 백마 탄 세상의 왕들을 이기십니다.
그렇다면 나귀 타신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까? 역시 나귀를 탄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큰 말을 타고 활보하는 가운데,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져주고, 섬기고, 용서하고, 감싸주고, 끝까지 인내합니다. 세상의 눈에는 바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그 나귀 탄 성도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며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하늘의 군대로 보입니다. 백마를 타신 예수님의 공격이 우리를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늘의 군대로 만들어 가시는 은혜의 씨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노 선교사가 임종 자리에서 자녀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평생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내가 가장 부족했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가장 많이 일하셨더구나." 그것이 나귀를 타고 살아간 한 사람의 마지막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살아내야 할 이야기입니다.
나귀 타신 왕, 그분이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십니다. 그 뒤를, 각자의 나귀를 타고, 우리가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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