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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말씀 묵상

나사로의 부활과 예수님의 십자가 - 나사로야, 나오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1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5~26)

어떤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친구의 아들이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곧장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이틀을 더 기다렸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당장 가면 살릴 수 있는데 왜 기다리는 겁니까?" 의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그가 도착했을 때 아이는 이미 숨을 거두고 장사까지 지낸 뒤였습니다. 사람들은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조용히 그 무덤 앞에 섰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무언가를 했습니다. 그것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 자체를 되돌리는 일이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이 사람이 처음부터 병을 고치러 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무너뜨리러 온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요한복음에는 모두 일곱 개의 표적이 등장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고, 왕의 신하 아들이 병에서 낫고, 38년 된 병자가 일어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풍랑이 이는 바다 위를 주님이 걸어오시고,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의 눈이 떠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어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옵니다.

이 일곱 표적은 단순한 기적의 나열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진리를 향해 달려가는 표지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이 땅에서 무엇을 이루실 것인가를 가리키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표지판을 보면서 표지판 자체에 매혹되었습니다. 떡을 먹고 배부른 것에 흥분하고, 병이 나은 것에 감격하고, 죽은 자가 살아난 것에 놀라면서도 그 표적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끝내 보지 못했습니다.

완전수 7은 이 표적들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은 앞선 여섯 표적이 말하려 했던 모든 것을 하나의 장면에 압축해 넣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표적이 끝나면, 표적의 시대가 닫힙니다. 이제 그 표적들의 실체이신 분이 직접 십자가를 지십니다.

주님이 나사로에게로 향하시는 여정은 아주 특별한 곳에서 시작됩니다. 요단강 저편, 세례 요한이 처음 세례를 베풀던 그 자리입니다. 주님은 거기서 이틀을 더 머무신 뒤 요단을 건너 유대 땅 베다니로 향하십니다.

이 장면을 읽는 요한복음의 독자들, 특히 구약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즉각 다른 장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이끌고 요단 동편에서 사흘을 기다린 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진입하는 장면입니다.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헬라어 표기가 바로 '예수'입니다. 이름이 같습니다. 사역이 같습니다. 구조가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을 건넌 후 무엇을 무너뜨렸습니까? 여리고입니다. 철옹성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성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이 무너졌습니다. 어떻게 무너졌습니까?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성 주위를 돌자, 성이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요단을 건너 향하시는 곳에도 그런 성이 하나 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입니다. 사망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어떤 의술도, 그 어떤 권력도 결코 깨뜨릴 수 없는 성벽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앞에 서십니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사건을 홍해를 건넌 사건과 동일선상에 놓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신 것이 홍해를 말리신 것과 같았나니"(수 4:23). 홍해를 건널 때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군대에 포위된 채 도망칠 곳이 없었습니다. 앞에는 바다, 뒤에는 적군이었습니다. 그 절대적 막힘 앞에서 하나님이 길을 여셨습니다. 요단을 건널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단강 동편,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출발하여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 이야기는 바로 그 요단 동편에서 시작됩니다. 죽음에 포위된 자리, 아무 희망도 없는 자리, 그 자리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출발점입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전갈을 보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메시지는 간결했지만 그 안에 담긴 간청은 절박했습니다. 어서 오셔서 고쳐 주십시오. 그런데 주님은 오지 않으셨습니다.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원문에는 6절 앞에
'우운', 즉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빠져 있지만, 이 단어가 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그러므로 이틀을 더 유하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을 뒤집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면 즉시 달려간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면 아프지 않게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아들이 청소년 시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알았습니다. 그러나 막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상하게 봤습니다. 왜 내버려 두느냐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막아봤자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아들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아들은 결국 그 길의 끝에서 바닥을 쳤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가 막지 않은 것은 무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들이 진짜 살아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병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병을 드러내어 뿌리째 뽑아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나사로를 죽게 내버려 두신 것은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병을 고쳐드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 자체를 폐기처분하러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사로가 완전히 죽어야 했습니다. 그 죽음이 완전할수록, 살아남의 은혜는 더욱 선명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사흘 동안은 시체 곁에 머물다가 나흘째에는 완전히 육체와 결별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흘이 지나면 되살아날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모든 희망의 여지가 닫힌 것입니다. 주님은 정확히 그 나흘째에 도착하셨습니다. 마르다가 달려나와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리아도 와서 똑같이 말합니다. 두 자매의 입에서 같은 말이 나옵니다. 그 말 안에는 원망도 있고 믿음도 있고 슬픔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중 나온 유대인들도 웁니다.

예수님은 그 울음의 현장 앞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통분히 여기다'는 강한 분노로 호되게 꾸짖는 것을 말하고, '민망히 여기다'는 분을 못 이겨 치를 떠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화가 나 계십니다. 누구에게 화가 나셨습니까? 마리아에게? 유대인들에게? 아닙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붙들고 놓지 않는 사망의 세력을 향한 분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혐오하십니다. 죄의 삯인 죽음, 인간을 종으로 삼아 눈물 흘리게 만드는 그 사망을 증오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십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짧은 문장 안에는 무한한 깊이가 있습니다. 그분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눈물에, 유대인들의 눈물에, 아니 사망 아래서 신음하는 모든 인간의 눈물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 56:8).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흘리는 눈물 한 방울도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 눈물들을 모두 당신의 병에 담아 두셨다가, 십자가에서 그 병을 산산이 깨뜨려 버리십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그 십자가를 미리 품고 있는 눈물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눈물을 보고 처음에는 감탄합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그러나 곧 비아냥으로 돌아섭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그들이 원하는 사랑은 고통을 없애주고 죽음을 피하게 해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죽음을 피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 자체를 무너뜨리는 사랑입니다. 그 두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릅니다.

주님이 무덤 앞에 섰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마르다가 말립니다. "주여, 죽은 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던 마르다가, 막상 무덤 문을 열라는 말 앞에서 물러섭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 불신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망 아래 있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주님은 굳이 무덤을 여십니다. 굳이 그 냄새 나는 시체를 드러내십니다. 왜입니까? 그것이 우리의 실제 모습이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덤 속에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가능성이 있었던 자들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앓고 있던 자들이 아닙니다. 이미 죽어서 썩어가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 무덤이 열리자 주님이 크게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 외침에 쓰인 단어 '크라우가조'는 요한복음에 여섯 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 외의 다섯 번은 모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죽여라!" 하고 외치는 장면에 쓰였습니다. 나사로를 살리는 그 목소리와,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가는 그 함성이 같은 단어 안에 겹쳐 있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이 죽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나왔습니다. 수족은 베로 동여매어져 있고,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 수건의 헬라어 단어
'수다리온'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무덤 안에 남겨진 수건과 동일한 단어입니다(요 20:7). 요한은 이 단어 하나로 나사로의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을 하나로 묶어냅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부활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에 쓰인 단어는 '압히에미' '휘파고'입니다. 이 동일한 단어가 요한복음 18장에 다시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는 장면입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그 직후 예수님은 결박당하십니다.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결박당하시는 순간, 제자들은 풀려납니다.

이것이 복음의 구조입니다. 죽어야 할 자가 풀려나기 위해, 죽지 않아도 될 분이 결박당하십니다. 나사로가 사망의 수의에서 풀려나기 위해, 예수님이 사망에 결박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결박당하신 분이 사망을 안에서부터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전쟁 포로 교환 협상에서 한 사람이 다수의 포로들 대신 홀로 잡혀 들어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가 들어가는 순간, 다른 모든 이들이 걸어나옵니다. 그가 결박당하는 순간, 그들의 사슬이 풀립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만 그분은 협상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원하여 들어가셨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나자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이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달려가 이 일을 고합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합니다(요 11:53).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눈앞에서 보고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적을 행한 분을 죽이려 했습니다. 기적이 믿음을 만들어 낸다는 생각은 이 본문 앞에서 무너집니다. 믿음은 기적의 산물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곧 유월절이 찾아옵니다(요 11:55).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여리고 앞 길갈 평지에서 처음 지킨 것이 유월절이었듯(수 5:10),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다음 행보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입니다. 무죄한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자들이 거저 살아나는 것, 그것이 유월절의 본질이고, 그것이 복음입니다.

나사로의 이야기는 어디선가 읽은 영웅담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한때 무덤 속에 있었습니다. 냄새가 났습니다.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누구도 우리를 살려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우리를 향해 요단을 건너오셨습니다. 사망의 결박에 자원하여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망 안에서 사망을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순간, 우리의 수의가 풀렸습니다.

지금도 눈물이 나십니까? 상황이 너무 무겁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마리아의 눈물 앞에서 함께 우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눈물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이미 십자가에서 깨어진 병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 사망은 이미 패배했습니다. 주님이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것은 당신을 향한 음성이기도 합니다. 무덤에서 나오십시오. 수의를 벗으십시오. 주님이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절대 실패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