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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말씀 묵상

하나님 백성 되어지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28.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한복음 13:8)

언어에는 때로 의도적인 어색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
하나님 백성 되기'라고 하면 문장은 매끄럽습니다. 그러나 그 매끄러움 속에 위험한 오해가 숨어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스스로의 결단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뉘앙스가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굳이 어색한 수동형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 백성 되어지기'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붙들려 만들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은 바로 그 '되어지기'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의 밤은 유독 고요했습니다. 유월절이 코앞이었습니다. 성 안 곳곳에는 어린양의 피 냄새와 무교병의 쓴 향기가 섞여 돌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 자리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는 누가복음이 솔직하게 전해 줍니다. 제자들은 만찬 도중에 싸우고 있었습니다. 주제는 한 가지였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가장 크냐." 스승이 십자가를 앞두고 마지막 밥상을 차린 그 자리에서, 제자들은 서열 다툼에 한창이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민낯입니다. 가장 거룩해야 할 순간에, 가장 낮아야 할 자리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높아지려 합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주님은 말없이 겉옷을 벗으셨습니다.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이 장면 하나가 온 우주의 질서를 뒤흔드는 광경입니다. 요한은 이 장면을 기록하면서 결코 우연이 아닌 단어들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이 벗으신 '
겉옷'은 헬라어로 '히마티온'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9장으로 가면 군병들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옷을 벗겨 나누어 갖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도 똑같이 '
히마티온'이 쓰입니다. 그리고 '벗으셨다'는 동사 역시 통상적인 표현 대신 '목숨을 버리다'는 의미를 품은 단어 '티데미'가 쓰였습니다. 요한은 지금 사람들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십시오. 이것은 단순한 세족 의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십자가입니다. 겉옷을 벗으심은 목숨을 내려놓으심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이 맨발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한 곳에 서는 자들에게 늘 명하셨던 그것인 신을 벗으라의 성취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심으로 제자들을 거룩한 맨발의 백성으로 만들어 내고 계신 것입니다.

이 장면이 우리를 더욱 숙연하게 만드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종들이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리면, 주인이 돌아와 그 충성스러운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도리어 수종을 들겠다고 하셨습니다(눅 12:35~37).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종들이 먼저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밤 이 식탁의 종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주님이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는 동안 곁에서 잠을 잤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자리에서 누가 크냐로 싸우던 사람들입니다. 허리에 띠를 두르고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린 것과는 거리가 한참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인이 먼저 일어나셨습니다.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두르시고,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이것이 '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말의 진짜 의미입니다. 우리가 준비되어 있어서 은혜가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을 때, 아니 준비할 능력조차 없을 때, 은혜는 먼저 찾아옵니다. 주님의 종 되심이 우리의 종 됨을 이끌어 내는 것이지, 우리가 먼저 종의 삶을 살아내어 주님의 섬김을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인간은 이토록 높아지려 합니까? 왜 제자들은 스승의 마지막 밥상에서도 서열을 따집니까? 그 뿌리는 창조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생명력을 풍성하게 부어 주셨습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릴 만한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 엄청난 능력이 하나님을 향해 반역하지 않도록 마련해 두신 경계선이 바로 '
선악과'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너희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더라도, 너희는 내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피조물임을 잊지 말라."

그러나 인간은 그 선을 넘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로 밀고 들어온 그 상태를 헬라어로 '
휘브리스', 교만이라 합니다. 인간은 백성의 자리에서 왕의 자리로 스스로를 높였고, 하나님마저 자신의 필요를 채워 주는 도구로 삼으려 했습니다. 비유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느 대기업의 신입 사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능력이 출중했습니다. 일을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감이 붙었고, 어느 순간부터 그는 사장의 결정을 무시하고 자신의 판단으로 회사를 운영하려 들었습니다. 상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낭비하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결국 그는 회사를 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그 자신이 무너졌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꼭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차고 앉아 스스로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이후, 인류의 역사에 남겨진 열매는 눈물과 사망과 애통과 아픔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왕의 자리를 찬탈한 가련한 죄인을 다시 백성의 자리인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리로 불러 내리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언약이 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발을 씻는다는 것은 단순한 위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30장에는 성소 앞에 물두멍을 두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소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제단과 물두멍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번제단에서는 흠 없는 제물의 피가 뿌려졌고, 물두멍에서는 물로 몸을 씻었습니다. 피와 물, 이 두 가지가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상징이었습니다. 물로 씻는다고 마음속의 더러움이 제거되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셨습니다(마 15:19~20). 구약의 물두멍은 장차 오실 분, 물과 피를 쏟아내어 우리의 죄를 말갛게 씻어내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미리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밤 예수님이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행위는,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던 그 예식의 실체가 마침내 도래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발 씻음은 곧 십자가로의 참여,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합니다.

8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그것을 확인해 줍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상관이 없다'는 원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유업과 영광에 공동 소유자로 참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연합'입니다. 예수님의 발 씻김을 거절하는 것은 곧 예수님과의 연합을 거절하는 것이며, 포도나무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처음에 주님의 발 씻김을 거절했습니까? 언뜻 보면 기특해 보이기도 합니다. '
어떻게 감히 스승께서 제 발을 씻기시겠습니까.' 겸손처럼 보이는 그 거절 안에는 사실 거절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정도의 자격은 된다, 혹은 나는 이 정도의 체면은 있다'는 아담 적 자존심이 그 거절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은혜를 거부했던 이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내가 거지처럼 공짜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내가 이 정도의 노력과 율법 준수를 쌓았는데, 왜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은 죄인과 같은 방식으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그 자존심이 그들을 은혜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구원은 체면 없이 받는 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하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값없이 내밀어진 선물을 그저 받아드는 것입니다.

거지가 동냥을 받으면서
"제가 어떻게 이런 걸 공짜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손사래를 치는 장면은 없습니다. 거지는 주는 대로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파산한 죄인인 우리가 은혜를 받는 방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면목 없이, 공로 없이, 그저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에서 주님은 의아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발이 온 몸에 포함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은 지금 이미 깨끗한 발을 닦고 계신 셈입니다. 여기서 '이미 목욕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현재 완료 수동태 분사입니다. 스스로 목욕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목욕시킴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스스로 씻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붙들려 씻김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이미 목욕한, 이미 깨끗한 제자들의 발을 또 닦으십니까? 어떤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이가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집을 떠날 때 깨끗하게 씻겨 보냈는데, 돌아온 아이의 발은 흙투성이였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다시 목욕시키지 않습니다. 그저 대야에 물을 받아 발을 씻겨 줍니다. 그리고 씻겨 주면서 말합니다.
"이것 봐. 이렇게 더러워졌는데도 엄마가 다 닦아 줬지? 넌 엄마 아이야."

주님의 발 씻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목욕한 자, 십자가로 깨끗해진 자임을 반복하여 확인시켜 주시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삶 속에서 우리의 연약함이 폭로될 때, 고난이 닥쳐올 때, 자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할 때, 주님은 그 모든 것을 통해 우리의 발을 닦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래서 네게 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 필요를 이미 십자가에서 채웠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한 것은 바로 그 발 씻음의 경험이었습니다. 날마다 자신의 옛 자아가 꺾이는 것을 보면서,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신의 삶 속에서 살아 역사하고 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지금도 우리의 발을 씻기시는지, 출애굽기 21장이 놀라운 방식으로 설명해 줍니다. 히브리 종 규례에 따르면, 상전의 집에 들어온 종은 6년간 섬기고 7년째에 자유를 얻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종이 상전의 집에서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다면, 가족은 상전에게 속하므로 혼자 나가야 합니다. 그 때 종이 가족을 사랑하여 자유를 포기하기로 결심하면, 상전은 그의 귀를 송곳으로 뚫어 영원한 종의 표를 남깁니다. 그리고 그 종은 상전의 집 상속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셔도 무방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신부,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를 이 땅에 두고 떠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종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 표가 부활하신 몸에 남아 있는 못 자국과 창 자국입니다.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의 손의 못 자국을 만졌을 때, 그 상처는 단순한 수난의 흔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는 너희를 두고 홀로 떠나지 않겠다"는 영원한 서약의 인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의 발을 씻기고 계십니다. 그것이 1절의 말씀,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오늘 밤 유월절 식탁에는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겉옷을 벗고 무릎을 꿇으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모든 것을 가지셨으면서도,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분입니다. 다른 한쪽에는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종의 신분이면서 마귀와 한 통속이 되어 주인을 팔려는 자입니다. 이사야 14장이 그리는 루시퍼의 모습인
"내가 하늘에 올라 지극히 높으신 자와 비기리라"가 바로 유다 안에서 재연되고 있었습니다. 낮아지는 자와 높아지려는 자입니다. 섬기는 자와 팔아넘기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 둘의 결말은 선명하게 갈립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지옥의 원리가 한 식탁 위에서 맞부딪히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잠을 자다 깨어나 보니 주님이 우리의 발을 붙잡고 계신 사람들입니다. 도망치려다가 붙잡힌 사람들입니다. 면목 없이 은혜를 받아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붙드심이 계속되어 우리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발 씻음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고난이 올 때, 자아가 무너질 때, 내 안의 깊은 죄가 폭로될 때, 그때 당황하지 마십시오. 무릎을 꿇으신 주님이 우리의 발을 붙잡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목욕한 자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이래서 내게 예수가 필요하다." 그 고백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 백성 되어지기의 한 장면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언약의 완성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날까지 주님은 우리의 발을 씻기를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끝까지 사랑하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