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 이니라.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 이로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 이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 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한복음 13:18~21,30)
1943년 겨울, 독일 점령 하의 프랑스 파리, 한 젊은 철학도가 레지스탕스 동료들의 명단을 손에 쥔 채 게슈타포 청사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뜨겁게 조국을 사랑했습니다. 가족도 학업도 버리고 지하 저항 운동에 몸을 던진 지 이미 삼 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청사 안으로 들어간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동료들의 이름을 넘기면 독일은 협상에 나설 것이고, 그 협상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진짜 애국이며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으며 문을 열었습니다.
나중에 그 동료들이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방법이 틀렸음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대신 스스로 내 죄는 내가 책임진다는 듯이 강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가룟 유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0절은 성경에서 가장 짧고 가장 서늘한 문장 중 하나입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이 문장에서 '밤'은 시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언제나 하나님의 반대편, 어두움의 권세가 지배하는 영역을 뜻합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고, 예수님 스스로 겟세마네에서 자신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유다는 그 어두움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불편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그 장면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고 계셨습니다. 유다의 발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주님은 그가 마귀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고 그 발을 두 손으로 감싸 씻겨 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본문 18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시편 41편에 이미 유다의 존재와 그의 행위가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셨고, 그가 밤으로 나가는 것도 허용하셨습니다. 이것은 불편한 진실입니다. 이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발적이거나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 안에서 통제되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귀조차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유다라는 마귀가 없었다면 십자가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유다를 삼 년 반 동안 곁에 두시면서 전도 여행에도, 기적의 현장에도, 파송의 자리에도 늘 함께하게 하셨습니다. 능력까지 더하셔서 그가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며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20절 말씀의 의미입니다.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주님이 보내신 '자격 있는 자'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저히 자격 없어 보이는 자를 통해서도 복음은 전해집니다. 애굽의 바로가 그랬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그랬고,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정확히 설명하는 예언을 입술에 담은 것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마귀까지 당신의 도구로 삼을 수 있을 만큼 광대합니다.
이 사실 앞에서 루터와 스펄전은 일기에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하나님, 저를 이렇게 사용만 하시고 지옥에 보내시려는 것은 아니지요?" 바울도 같은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노라"(고전 9:27). 이것은 구원의 확신이 흔들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와 긴장감 속에서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겉으로 하나님께 쓰임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의 택한 자인 것은 아닙니다. 바로 내가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가룟'은 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속했던 비밀 자객 단체, 시카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카리는 히브리어로 '단도를 품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열심당원들은 가족도 직업도 버리고 오직 하나의 목표에 몸을 던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 다윗 왕국의 영화를 이 땅에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도를 품고 시장을 활보하다가 로마에 빌붙은 유대인을 처단했고, 민중 속에 섞여 로마 병사의 옆구리에 칼을 꽂았습니다.
유다는 애국자였습니다. 비겁한 배신자가 아니라, 뜨겁고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오병이어로 수만 명을 먹이고, 폭풍을 꾸짖어 잠잠하게 하며, 죽은 자를 살려낸다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소문으로 들려옵니다. 유다는 그 힘을 자신의 꿈을 위해 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를 내세워 "주께서 왕이 되시면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했습니다. 그들 모두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꿈을 보았습니다. 정치적 메시아, 군사적 지도자, 다윗 왕국의 부활을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죽겠다고 합니다.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유다는 초조해집니다. '분명히 저분에게 힘이 있다. 누군가가 그분을 공격하면 분노하여 일어서실 것이다. 그리고 그 분노가 민중 봉기로 이어질 것이다.'
때마침 유월절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200만 명이 넘는 유대인 장정이 모여 있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황제에게 증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수시로 보낼 만큼 치안이 위태로웠습니다. 유다 마카비가 성전을 탈환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 시대였습니다. 유다는 생각했습니다. '지금이다. 지금 스승을 자극하면 된다.' 그래서 그는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의 위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거래가 아니라 선동 계획이었습니다. 은 삼십은 당시의 화폐 가치로도 아주 작은 금액이었습니다. 그 정도 돈은 유다가 맡고 있던 돈궤 안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에게는 그 돈보다 훨씬 큰 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말없이 잡혀가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유다는 저항의 기미를 기다리며 그 뒤를 쫓아갔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때서야 자신의 방법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았다!" 그는 은을 성소에 내동댕이쳤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목을 맸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다의 죄는 과연 무엇입니까? 단순히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죄가 있습니다. 유다의 죽음을 다시 보십시오. 그는 구차하게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내 죄는 내가 책임진다는 듯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장렬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그 자세를 죄라고 합니다.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신의 힘과 판단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그 태도, 내가 원하는 행복과 정의를 내 방식으로 쟁취하려는 그 시도,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 교만, 이것이 유다의 죄이고,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아담의 선악과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담은 어리석어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나도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는 욕망으로 먹었습니다. 자신의 위에 절대 상위권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것이 죄의 첫 번째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아담의 이야기가 민족적 이스라엘 전체의 역사로 반복됩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겠습니다"라고 나선 것도 같은 구조입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다는 자기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그 반복되는 실패의 역사가 마침내 십자가 바로 앞에서 가룟 유다 안에 집약됩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는 단순히 한 명의 나쁜 제자가 아닙니다. 그는 민족적 이스라엘의 다른 이름인 '유다'를 짊어지고 있고, 그 이스라엘이 상징하는 타락한 인류 전체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아담에서 시작되어 이스라엘을 거쳐 유다에게서 완성된 이 이야기는 한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인간은 반드시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 비밀을 두 단어로 풀어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고 할 때의 '시험'은 헬라어 페이라스모이스입니다. 믿음을 연단하는 하나님의 허락, 즉 '시험'입니다. 반면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고 할 때의 '시험'은 전혀 다른 단어 페이라조메노스, 즉 '유혹'입니다. 어떻게 같은 상황이 어떤 이에게는 연단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유혹이 됩니까? 14절이 답합니다.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개입하는 순간, 연단은 유혹으로 돌변합니다.
한 교사가 두 학생에게 같은 시험을 치르게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 학생은 어렵고 낯선 문제들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교사에게 다가가 도움을 청합니다. 그 시험이 그를 교사에게로 이끌었습니다. 다른 학생은 같은 문제 앞에서 부정행위를 선택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 답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욕심이 그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끈 것입니다. 동일한 시험지가 한 사람에게는 연단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유혹이 됩니다.
선악과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담에게 "나는 하나님 하위의 존재이며, 내 위에 절대 상위권자가 계심을 인정한다"는 고백을 살아내게 하는 장치였습니다. 그런데 욕심이 개입했습니다. "나도 저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그 순간 연단은 유혹이 되었고, 유혹은 죄를 낳았으며, 죄는 사망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설령 시험에 실패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 실패에 임하면 그 실패조차 연단이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통곡했을 때, 그 실패는 그를 더 깊은 자기 인식으로 이끌었습니다. "나는 이럴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그래서 주님이 필요하다." 실패의 경험이 은혜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유다는 그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패를 인정하는 대신, 책임을 자기가 지겠다고 나섰습니다. 그것이 그를 밤 속으로 영원히 밀어 넣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이야기의 끝에서 한 가지 선택 앞에 놓입니다. 유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유다, 그 나쁜 놈"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어떻게 하나님이 그를 미리 작정해 놓고 벌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전혀 다른 반응입니다. 손가락으로 유다를 가리키기 전에, 그 손가락이 나 자신을 향하도록 돌려야 합니다.
나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안전한 미래를 위해, 더 많은 인정을 받기 위해 예수님보다 다른 무언가를 선택한 적이 없습니까? 입술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이 세상의 다윗 왕국을 꿈꾼 적이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기보다 내 힘으로 책임지겠다고 나선 적이 없습니까?
그것이 유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입니다.
"내가 바로 유다입니다. 내가 세상의 힘을 얻으려고 예수를 배신했고, 내가 예수를 팔았으며, 내가 예수를 죽인 자입니다." 이 고백이 터져 나오는 곳에서, 비로소 은혜가 시작됩니다. 유다의 반대편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있습니다. 그들이 유다와 달랐던 것은 능력이나 성품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은혜였습니다. 밤으로 나간 유다 앞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어느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종의 자리로 내려가는 삶 (0) | 2026.05.04 |
|---|---|
| 하나님 백성 되어지기 (0) | 2026.04.28 |
| 버려짐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 (1) | 2026.04.21 |
| 왜 하나님은 빛을 숨기셨는가? (0) | 2026.04.13 |
| 밀알이 되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1) | 2026.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