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다야, 유다야 - 내가 너를 품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더냐. 그런데 네가 원치 않았도다."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 저녁, 한 노인이 요양원 창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낡은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습니다. 사진 속에는 젊은 날의 그와 아들이 나란히 서서 웃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똑똑하고 잘생겼으며 누구보다 야망이 넘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십 년 전 아버지의 재산을 두고 법정 싸움을 벌인 뒤 연락을 끊었습니다. 노인은 그 사진을 매일 꺼내 들고 같은 말을 중얼거렸습니다. "아들아, 아들아.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리는지 아느냐." 그 노인의 중얼거림 속에서 우리는 훨씬 오래되고 훨씬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음성을 듣습니다. "유다야, 유다야. 내가 너를 품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더냐. 그런데 네가 원치 않았도다." 배신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옵니다.
요한복음 13장 18절에서 예수님은 시편 41편 9절을 인용하십니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낯선 적이 아닙니다. 원수가 아닙니다. 함께 밥을 먹던 사람입니다. 같은 식탁에서 떡을 나누던 사람입니다. 시편 41편을 기록한 다윗은 그 배신을 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다윗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도망해야 했습니다. 압살롬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두고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뛰어난 외모, 탁월한 지혜,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카리스마, 그런 아들이 아버지의 왕좌를 빼앗으려 일어선 것입니다.
다윗의 가장 친한 친구 아히도벨도 그 반역에 가담했습니다. 아히도벨은 훗날 유다처럼 목을 매어 자살합니다. 압살롬은 요압의 창에 찔려 죽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렇게 울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승리한 왕의 울음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울음입니다. 자신을 배신하고 죽음으로 달려간 아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아버지의 울음입니다. 그 울음이 시편 41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고, 예수님은 바로 그 시편을 유다의 이야기에 겹쳐 읽으십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부른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부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훨씬 더 오래된 이야기의 반복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아담을 찾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모르셨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아담을 향한 부르심이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배신한 자를 향해 애타게 부르시는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배신한 자들에게 살 길을 여십니다. 창세기 3장 15절, 이른바 원시복음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서 '발꿈치'라는 히브리어 단어 에케브가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성경 전체에 딱 세 번 나옵니다. 창세기 3장,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 그리고 시편 41편. 셋 모두 구조가 같습니다. 악의 세력이 하나님 언약의 후손을 발꿈치로 짓밟으려 하지만, 결국 그 언약의 후손이 악의 세력의 머리를 밟아 부수는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발꿈치를 든다"는 표현은 종이 주인을 발로 차고 도망가는 모습에서 온 말입니다. 뱀이 그랬고, 에서가 그랬고, 압살롬이 그랬고, 유다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발꿈치를 드는 행위가 결국 자신의 머리를 내어주는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반복하는 역설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패턴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신하는 자들은 항상 가장 뛰어난 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압살롬은 이스라엘 최고의 미남이었고, 에덴의 뱀은 "가장 간교한", 곧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가장 지혜로운 존재였습니다. 유다는 열두 제자 중 재정을 맡을 만큼 신임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6장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세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하나님의 심판을 촉발시킨 것은 못나고 무능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용사이며 유명한 자이며 아름다운 자라고 자처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강한 자로 설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약함에서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는 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뛰어나다고 여기는 순간, 인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도구로 쓰기 시작합니다. "내 꿈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이 싹트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다의 실패였고, 압살롬의 실패였으며, 아담의 실패였습니다.
어느 대형 교회의 부흥회에서 강사가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 잠재력을 깨우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최고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박수가 터졌습니다. 그러나 그 외침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본문 26절에서 예수님은 유다에게 떡 한 조각을 찍어다 주십니다. 요한이 "그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그 순간, 예수님은 이름을 말씀하시는 대신 직접 떡을 집어 유다에게 건네십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이것은 특별한 행위였습니다. 떡을 찍어 먹여주는 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만 하는 친밀함의 표시였습니다. 예수님은 배신자를 폭로하시는 대신, 배신자에게 사랑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부르심이었습니다. "유다야, 돌아오너라."
그러나 유다는 그 떡을 받고 곧 나갔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밤이러라." 단순한 시간의 기록이 아닙니다.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간 유다의 영혼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유기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셔서가 아닙니다. 끝까지 손을 내미셨는데, 그 손을 뿌리치고 밤으로 나간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다른 제자들은 "주여, 내니이까?"라고 묻는데 유다만은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부를 수 없습니다. 유다는 그 오랜 시간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예수님을 결코 자신의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언제나 이용할 수 있는 '랍비', 곧 선생님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유다의 대척점에 선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베드로입니다. 그러나 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베드로는 사실 유다보다 더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다가 성소에 돈을 던지며 "그는 무죄다"라고 외치고 목을 매던 그 시각, 베드로는 예수님의 면전에서 세 번이나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적어도 자신이 한 일을 후회했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이 잡혀가는 그 밤, 살겠다는 일념으로 세 번 연속 부인했습니다.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나 같은 게 무슨 주님의 제자냐."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가십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한 베드로를 찾아가,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게 하시고, 숯불에 생선을 굽고 계십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만약 유다 같은 사람이었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제가 그런 짓을 저지르고 어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멋있는 대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자존심을 붙들고 있는 대답입니다.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평가하는 대답입니다.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께서 아십니다." 뻔뻔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정직한 대답이었습니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십니다. 나의 연약함도, 나의 실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있는 것도 주님이 아십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섭니다. 구원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멋진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끝까지 찾아오시고,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에, 면목 없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발을 씻겨주신 뒤 이렇게 명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웃 사랑은 새로운 계명이 아닙니다. 레위기 19장에 이미 있는 옛 계명입니다. 그렇다면 왜 '새 계명'이라고 하십니까? 계명의 내용이 아니라 그 계명에 이르는 방법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옛 계명 아래서 사랑은 의지의 문제였습니다. 새 계명 아래서 사랑은 은혜의 결과입니다.
한 상담사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오랫동안 알코올 중독으로 가족을 힘들게 했던 한 남자가 마침내 회복 프로그램에 들어갔습니다. 프로그램의 첫 단계는 "나는 내 삶을 통제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몇 달을 버텼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 내 의지로 끊겠다." 그러나 그것이 무너지고 마침내 "나는 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에게 진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나는 사랑할 수 있다"는 확신이 깨어지는 자리에서 진짜 사랑이 시작됩니다. 내가 얼마나 더럽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아는 사람은 다른 이의 더러움과 무력함 앞에서 손가락질을 하지 못합니다. 내가 가장 큰 빚을 진 사람임을 아는 사람은 자신에게 작은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의 공로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한 사람들은 조용합니다. 거리에서 정의를 외치기 전에 먼저 자신 안에서 주님의 은혜를 봅니다. 그리고 선하게 살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정죄 대신 이 기도를 드립니다. "저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신앙의 성숙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 됐습니다. 혼자 잘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숙이 아니라 압살롬의 반복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점점 더 깊이 하나님께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침내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던지는 것이 완전한 의존이며 참된 성숙입니다.
유다가 나간 직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십자가의 죽음이 확정된 그 순간이 영광의 순간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영광이란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 원하는 것을 얻는 것,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다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릴없이 죽어가시는 아들을 보시며 "네가 나를 영광스럽게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뜻이 이루어질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자기부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힘을 이용해 네 꿈을 이루라"는 가르침은 복음의 탈을 쓴 압살롬의 반역입니다. 복음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네 꿈을 내려놓아라."
두 친구가 자장면을 먹다가 단무지가 마지막 한 조각 남았습니다. 둘은 서로 눈치를 보며 젓가락을 뻗었습니다. 옥신각신하다 합의를 봤습니다. 서로 상대방 뺨을 때려서 울지 않는 쪽이 먹기로 했습니다. 먼저 A가 B의 뺨을 힘껏 후려쳤습니다. B는 눈물을 참았습니다. 이제 자신이 때릴 차례, 이를 악물려는 순간 A가 그 단무지를 집어 B의 입에 넣어주며 말했습니다. "그냥 너 먹어." 그리고 종업원을 불렀습니다. "단무지 한 접시 더요!"
오늘 이 세상 사람들이 생사를 걸고 빼앗으려 하는 것이, 그 종지 안에 남은 단무지 한 조각과 얼마나 다릅니까? 조금만 눈을 돌리면, "단무지 한 접시 더요"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합의해 놓은 유한한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풍요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요양원 창가의 노인이 매일 꺼내 드는 그 낡은 사진, 그 노인의 중얼거림, "아들아, 아들아.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리는지 아느냐."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유다를 향해서도, 우리를 향해서도, "유다야, 유다야. 내가 너를 품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더냐." 그 부르심에 "네" 하고 돌아서는 자들이 하나님의 선택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유다처럼 가망 없던 자들이었는데, 베드로처럼 면목 없이 용서받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것이 끝까지 사랑하심입니다.
우리는 모두 유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드로의 이야기를 허락하십니다. 언제든 사라질 한시적 행복에 목숨 걸지 마십시오. 자신을 부인해 가며, 그 비워진 자리에 가득 채워질 하늘의 참 복, 영생의 행복에 당신의 목숨을 거십시오. 그리고 오늘, 그 부르심에 조용히 응답하십시오. "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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