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2~3)
1944년 겨울, 네덜란드의 한 시계 수리공의 딸 코리 텐 붐은 라벤스브뤼크 나치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영하의 추위 속에서 이와 벼룩이 들끓는 막사, 짐승보다 못한 대우, 매일 눈앞에서 벌어지는 죽음들, 그녀의 언니 베치는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베치는 극도로 쇠약해진 몸으로 코리의 손을 잡고 속삭였습니다. "코리, 우리는 이 고통을 경험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거야. 우리는 집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아름다운 집을 지어야 해." 베치는 얼마 후 그 수용소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그러나 코리는 살아남았고, 전쟁이 끝난 뒤 실제로 전쟁 피해자들을 위한 쉼터를 세웠습니다. 훗날 코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베치와 내가 그 수용소에서 경험한 모든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처소가 되기 위한 준비였다는 것을." 처소, 집, 머물 곳, 이 단어들이 왜 이토록 우리 가슴을 건드리는 것일까요? 인간은 누구나 어딘가에 속하고 싶어 하고, 누군가와 함께 머물고 싶어 합니다. 집이란 단순히 지붕과 벽으로 이루어진 구조물이 아닙니다. 집은 관계이고, 안식이며, 존재의 근거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마지막 밤,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의 한복판에 바로 이 '처소'라는 단어가 놓여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날 밤의 공기는 무거웠습니다. 유월절 만찬이 끝나가던 그 자리에서, 가룟 유다는 이미 스승을 팔기 위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베드로는 목숨을 바쳐 따르겠다고 외쳤지만, 예수님은 그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한 방 안에 유다와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스승 밑에서 3년을 보냈고, 같은 밥을 먹었고, 같은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그 어떤 외적 조건으로도 두 사람을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 밤 이후 돌이킬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다른 한 사람은 눈물로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역사를 바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서 왔습니까? 능력의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도덕성의 차이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한 사람에게는 은혜가 임했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신학은 이 냉혹하고도 신비로운 사실을 '이중예정'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공평함이 아니라,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달려 있다는 선언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는 말이 가능하려면 근심하지 않아도 될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근거를 이렇게 제시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이 말씀을 처음 들으면 누구나 그림 한 장을 떠올립니다. 하늘 어딘가에 있는 아름다운 궁전, 수많은 방들, 예수님이 그 방들을 하나하나 단장하고 계신 모습, 죽고 나면 그 방 하나를 배정받게 될 것이라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그 그림에는 금방 균열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방금 전 '거할 곳이 이미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십니다. 이미 많다면서 왜 또 만들러 가시는 것일까요? 천국이 아직 공사 중이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지금껏 2천 년 동안 하늘에서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계신 것입니까? 이 의문은 우리가 '처소'라는 단어를 너무 문자적으로, 너무 공간적으로 읽은 데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처소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편히 거하실 수 있는 마음의 상태, 곧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머물 수 있는 관계의 공간입니다. 왜 이것이 문제입니까? 예레미야가 이렇게 썼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근본적으로 부적합한 곳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더러운 죄인이 같은 공간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은, 마치 수술실에 흙투성이 장화를 신고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기준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출애굽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시면서도 성막 안에 숨어 계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직접 드러내시는 순간, 죄인들은 그 거룩함을 견딜 수 없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모세조차,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지나가시는 뒤태만을 바위틈에 숨어서 겨우 엿볼 수 있었을 뿐입니다. 이 절망적인 거리, 이 메울 수 없는 간격, 이것을 메우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처소 예비'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오랜 세월 방치되어 폐허가 된 고택이 있습니다. 지붕은 내려앉고, 벽에는 곰팡이가 피었으며, 마룻바닥은 썩어 있습니다. 귀한 손님을 이 집에 모실 수 없습니다. 집 자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집을 고치는 비용은 집 주인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때 집 주인의 아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그 집을 완전히 새롭게 고쳐놓겠다고 나섭니다. 낡은 것들을 다 걷어내고, 새 지붕을 얹고, 새 바닥을 깔고, 마침내 귀한 손님이 기쁘게 들어오실 수 있는 집으로 만들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 일입니다. 에스겔은 수백 년 전에 이미 이 장면을 예언했습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 정결하게 하되 …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내 신을 너희 속에 두리라."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고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불가능한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예언이 골고다 언덕에서 성취됩니다. 어린양의 피로 씻기어 희어진 옷, 더럽고 좁았던 마음 자리가 청결해지고, 마침내 그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오십니다. 산상수훈의 그 말씀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처소가 완성됩니다. 그 처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 진리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역설이 구약성경에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내가 언제 사람이 만든 집에 거하는 것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다윗에게 역방향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집, 곧 영원한 가문을 세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훗날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 성전은 장엄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무너졌습니다. 바벨론의 군대가 그 화려한 성전을 불태웠습니다. 하나님이 예언하신 대로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스데반은 이 사실을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솔로몬의 성전이 무너진 것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의 메시지였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공력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모두 불타버립니다. 진정한 성전,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는 인간이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으시는 것입니다. 그 성전이 바로 교회이고,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천국을 '죽고 나서 가는 곳'으로만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죽고 나서 천국에 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이 지금 너희 가운데 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임했다." 하나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고, 그 다스림에 기쁘게 순복하는 백성이 있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천국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천국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십니다. 그런데 동시에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처소로 삼으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집이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신학은 이것을 '상호 내주'라 부릅니다. 주님이 자주 말씀하셨던 그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그리고 우리에게로 확장되는 그 말씀,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이것은 단순한 신앙의 언어가 아닙니다.
이것은 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과 함께 거하기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의 '안식'은 피로해서 쉬셨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하여 그분과 하나가 된 상태, 곧 상호 내주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죄가 그 안식을 깨뜨렸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안식을 영원히 회복한 것입니다.
코리 텐 붐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후, 사람들은 그녀에게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 지옥 같은 곳에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까?" 코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수용소 안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저는 하나님 안에 있었고, 그래서 그 지옥 속에서도 처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처소가 되신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환경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자리, 두려움 속에서도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 그 처소는 건물이 무너져도, 나라가 망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처소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을 때, 그것은 하늘 어딘가에 부동산을 마련하겠다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십자가를 질 것이다. 그 십자가의 피로 너희의 더러운 마음을 씻어 낼 것이다. 씻겨진 그 자리에 아버지와 내가 들어가 거할 것이다. 너희가 우리의 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집이 될 것이다. 그것이 처소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 다시 울려 퍼집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리고 23절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함께 거하시겠다는 것이 처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처소는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을 때, 그 처소는 신분적으로, 선언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지금도 그 나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화라 합니다. 하나님이 편히 거하실 수 있도록 우리 안의 낡은 것들이 걷혀 나가고, 새로운 것들이 심어지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자기 부인의 사건들을 만납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 감당하기 힘든 관계들,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들은 형벌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공사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거하실 처소를 만들어 가시는 공사인 것입니다.
코리 텐 붐이 라벤스브뤼크에서 경험한 것처럼, 그 고통의 과정은 우리를 더 넓은 처소로, 더 많은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집으로 빚어 가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잠언은 말합니다.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는 죽음을 면케 하느니라." 그날에 우리를 지켜 줄 것은 우리가 쌓은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어 계신가, 그것뿐입니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길을 함께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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