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한복음 14:4~7)
1990년대 초, 인사동 골목 안쪽에 '귀천'이라는 작은 카페가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늘 구석 자리에 앉아 계신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빛바랜 점퍼, 그러나 눈빛만은 어린아이처럼 맑았던 그분은 시인 천상병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며 "천 원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막걸리 한 사발을 드셨는데, 그게 선생님의 한 끼 식사였습니다. 그 시절 대학생들은 그 카페에 드나들며 선생님 곁에 앉아 막걸리를 얻어 마셨습니다. 선생님은 말씀이 많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함께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깊은 것이 전해졌습니다.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던 분이었습니다..
그 카페에 드나들던 한 학생이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편의 시를 통해서였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그 학생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죽음을 이토록 담담하게, 이토록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습니다. 귀천은 하늘로 돌아감입니다. 누구나 두려워하는 그 죽음을, 선생님은 소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처럼 쓰셨습니다.
이 시가 어둡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돌아갈 곳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 곳을 아는 사람은 두렵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두 손을 꼭 모으고 "아빠, 아버지" 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이 시의 뿌리였습니다. 오늘 그 질문을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은 돌아갈 곳을 알고 계십니까? 그 길을 찾으셨습니까?
어떤 지독한 길치의 이야기입니다. 분명히 여러 번 다닌 길인데도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먼 거리에 있는 지인의 집을 갈 때는 늘 다른 사람이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운전을 하면서 딴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탓인지, 내비게이션을 켜 놓아도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도 절대 헷갈리지 않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날도, 어떤 상태에서도 잃어버린 적이 없는 길, 바로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어떻게 그 길만은 기억하느냐고요? 사실 그가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이 그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길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길이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짧은 한 문장 안에, 기독교 신앙의 전부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산에 오르는 길이 어찌 예수 한 길뿐이겠습니까? 불교도, 이슬람도, 힌두교도 각자의 방식으로 진리를 찾아가는 것 아닙니까? 기독교만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건 너무 독선적인 것 아닙니까?" 언뜻 들으면 굉장히 포용력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을 때마다 히말라야 베이스캠프 앞에서 동네 뒷산 오르듯 등산화 끈을 묶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동네 뒷산이라면 어느 길로 올라도 됩니다. 샛길도 되고, 계단도 되고, 심지어 길이 없는 곳을 헤치고 올라가도 됩니다. 그러나 히말라야는 다릅니다. 산소통, 특수 장비, 전문 셰르파, 그것 없이 한 발짝 내딛는 순간 목숨을 잃습니다. 그 산은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라는 산이 바로 그렇습니다. 고행의 산, 참선의 산, 선한 행위의 산, 이것들은 인간의 힘으로 오를 수 있는 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산은 인간의 노력으로 단 한 걸음도 오를 수 없는 산입니다. 목적지가 다른 게 아니라, 그 산의 높이 자체가 다릅니다. 그러니 "길이 어찌 하나뿐이겠는가"라는 말은 사실 하나님이라는 산이 얼마나 높은지 모르는 데서 나오는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불교 학자 스스로도 이 차이를 인정한다는 점입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윤호진 교수는 논문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불교와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다른 바탕을 가진 종교이기 때문에, 불교인에게 기독교 교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를 공격하는 말이 아닙니다. 두 종교가 출발점도, 길도, 목적지도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독 기독교만 배타적이라는 비판을 받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기독교가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인간 안에 불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유교는 인간의 도덕적 가능성을 말합니다. 다른 종교들은 인간을 추켜세웁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말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 은혜가 필요하다." 이 말이 죄인의 자존심을 정면으로 뭉갭니다. 그래서 거부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로 가면 죽음으로 향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것이 포용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직무유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 유일한 길조차, 인간 스스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젊은 시절, 진짜 열심히 길을 찾으려 했습니다. 종로로 갈까, 명동으로 갈까, 이 사람 말을 들을까, 저 책을 읽을까,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시간이 길었습니다. 찾으면 찾을수록 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길이 아닌 것들을 길이라 착각하며 헤맸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길을 찾은 것이 아니라 길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공항 긴 복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멀고 먼 게이트를 향해 걸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바닥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무빙워크입니다.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어도 그 길이 우리를 앞으로 데려갑니다. 우리가 게이트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우리를 목적지로 옮겨주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길이 그렇습니다. 그 길이 우리를 찾아와 우리를 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우리를 데려갔습니다. 요한복음 1장은 이것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길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삼 년 반을 예수님과 함께 지낸 도마조차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길이 눈앞에 서 계신데 길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베드로는 더 적나라합니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얼마나 비장한 결단입니까.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냉정했습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인간의 의지와 결단은 닭 한 마리의 울음 앞에 무너집니다. 그게 우리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먼저 오신 것입니다. 길이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결코 화려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의 노예 살이에서 건져내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셨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구름에 태워 가나안으로 바로 옮겨 주시지 않았습니다. 사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뜨거운 광야를 두 발로 걷게 하셨습니다.
그 길에서 이스라엘이 만난 것들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 반석에서 터진 생수, 높이 달린 놋 뱀, 그리고 성막, 이것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도 모르는 채 예수를 밟고 가나안을 향해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불평과 원망이 쉬지 않고 터져 나왔습니다. "차라리 애굽이 나았다." "이 광야에서 다 죽겠구나." 결국 출애굽 1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광야는 인간의 나약함과 불가능함이 낱낱이 드러나는 길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길입니다. 그 자기 부인이 없이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것이 예수라는 길입니다. 좁고, 협착하고, 고단한 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이상한 말들이 넘쳐납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 질병도 사라진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간다, 사업이 번창한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약속이 없습니다. 그런 넓고 화려한 길은 예수라는 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느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해 오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가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보증을 잘못 서서 집까지 넘어갔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기도를 안 한 거야." 그분이 목사님을 찾아오셨을 때, 얼굴에는 수치와 당혹감이 가득했습니다. 목사님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까?" 그분이 눈물을 글썽이며 답하셨습니다. "네, 목사님. 무너질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에 하나님이 얼마나 가까우셨는지 몰랐는데, 망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그것입니다. 성도의 성공은 결과의 모양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느냐로 결정됩니다.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떨어졌어도 그로 인해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다면 그것이 복입니다. 사업이 번창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부를 쓰고 있다면 그것도 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그 형태가 어떠하든 성공의 과정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없이 대기업 총수가 되고 명예를 얻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저주요 심판입니다. 성도의 형통은 하나님의 함께하심 그 자체입니다.
기독교는 내가 무언가를 이루어 하나님 앞에 서는 종교가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런 나를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셨는지를 배우며, 그 은혜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난이 쓰일 수 있습니다. 질병도 쓰일 수 있습니다. 망함도 쓰일 수 있습니다. 부유함도, 건강도, 명예도 쓰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 더 깊이 이끌어가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니 지금 당신 앞에 펼쳐진 삶의 모양에 너무 목매지 마십시오. 그 모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그 길 위에 서 있느냐입니다.
천상병 선생님이 막걸리 한 사발로 하루를 사셨지만 그 눈빛이 그토록 맑고 자유로웠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은 돌아갈 길을 알고 계셨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 길이 그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길의 이름이 예수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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