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 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한복음 14:7~12)
어느 병원 복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오랫동안 앞을 보지 못했던 한 사람이 수술을 받고 병원을 나섰습니다. 늘 다니던 길, 손에 익은 지팡이의 감촉, 발끝으로 세던 보도블록의 개수로 한 번도 헤매지 않고 찾아가던 그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눈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는 길 한복판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이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눈을 감고 다닐 때는 손쉽게 찾아가던 우리 집을, 눈을 뜨니 오히려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상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지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그날부터, 돈과 명예와 인기 같은 세상의 빛들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정작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눈을 떴다고 다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아야 보이는 길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이야기는, 바로 이 '봄'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봄의 끝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약속에 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라고 말씀하시자, 빌립이 참지 못하고 끼어듭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 말을 들으면 어딘가 낯이 익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종종 이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한 번만 확실하게 보여주세요. 그러면 믿겠습니다." 인생의 어느 갈림길에서, 혹은 견디기 힘든 고난 속에서 우리는 빌립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그런데 빌립의 이 요청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아십니까?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들었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 하나님을 본 죄인은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거룩과 죄는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태양을 맨눈으로 정면으로 바라보면 눈이 상하듯이, 죄인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 앞에 서면 존재 자체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스스로를 숨기신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무정함이 아니라, 오히려 자녀들을 살리시려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불에 델까 봐 아이 손을 촛불에서 떼어놓는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히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1:20) 밤하늘의 별, 계절의 질서, 태어나는 생명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신호입니다. 마치 화가가 그림 구석구석에 자신의 서명을 숨겨놓듯이, 하나님은 창조 세계 곳곳에 당신의 흔적을 남겨두셨습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일반계시'라 부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서명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림을 봐도 화가의 이름을 읽을 줄 모르는 것처럼, 인간의 영적 시력은 이미 너무 흐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십니다. 한 민족을 택하여 말씀으로, 언어로 당신을 계시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그리고 선지자들이 그렇게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조차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마치 아무리 정확한 편지를 보내도 받는 사람이 그 언어를 모르면 소용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반복해서 선포되었지만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지막 방법을 쓰십니다. 편지가 아니라, 사람을 직접 보내신 것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2) 그 아들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 곧 '로고스'라 부릅니다. 하나님이 하실 말씀을, 이번에는 종이가 아니라 살과 피를 입고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어느 집 부엌 풍경입니다. 남편이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를 깼습니다. 아내가 화를 낸다면 누구에게 냅니까? 장갑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장갑은 그 자체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장갑 안에 손이 들어가야 비로소 장갑이 움직이고, 일을 하고, 때로는 실수도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이 그림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11:20)
여기서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로 번역된 헬라어는 원래 '하나님의 손가락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신 셈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손가락이 끼워진 장갑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은 예수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빌립이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하나님의 얼굴은, 이미 자기 눈앞에 삼 년째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길을 걷던 그 예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다'는 것이 다 같은 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20장,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갑니다. 젊은 요한이 먼저 도착해서 무덤 안을 들여다봅니다. 세마포가 놓인 것을 '보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때 쓰인 단어는 '블레포', 그냥 눈에 형상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치 지나가다 진열장 안의 물건을 흘낏 보는 것과 같습니다.
곧이어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세마포를 '봅니다.' 이번엔 '데오레오'라는 단어가 쓰입니다. 뚫어지게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봄입니다. '누군가 시신을 훔쳐갔다면 이렇게 수의를 가지런히 개켜놓고 갔을 리가 없는데...' 하며 이상하게 여기는 시선입니다. 형사가 현장을 검증하듯 살피는 눈입니다. 그런데 8절에서 요한이 다시 들어가 보고는 '믿습니다.' 이때 쓰인 단어가 '오라오', 이해하여 그 의미를 깨닫는 봄입니다. 단순히 빈 무덤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아, 주님이 정말 부활하셨구나' 하고 마음이 열리는 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실 때 쓰인 단어가 바로 이 '오라오'입니다.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망막에 그분의 형상을 새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왜 오셨고 무엇을 하셨는지를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볼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24:45)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을 봅니다. 이천 년 전 사람들은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지금 우리는 육신으로는 뵌 적 없는 그분을 성경을 통해 진짜로 봅니다. 그 시대 사람들보다 오히려 우리가 더 선명하게 예수님을 뵐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변화산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과 모세와 엘리야까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완벽한 '블레포'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그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눈으로 본 것이 삶을 바꾸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 오늘 우리는 그 영광의 순간을 육신으로 본 적이 없지만, 성경을 통해 그 의미를 깨닫고 믿음으로 삶이 바뀝니다. 이것이 '오라오'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뒤집어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뭔가 보여주시면 믿겠습니다"라는 태도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왕의 신하가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4:48)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집으로 가지 않으시고 그저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그 사람은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채, 그 한 마디를 믿고 발걸음을 돌립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야 정말 아들이 살아난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순서입니다.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나서 보는 것입니다. 마치 씨앗을 심는 사람이 열매를 먼저 보고 심는 것이 아니라, 땅에 묻은 후에야 열매를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순서를 뒤집으면 아무것도 심을 수 없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1:40)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하신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가 갈라지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을 눈으로 다 보았지만, 결국 광야에서 믿음 없이 스러졌습니다. 본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내가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11절)고 하실 때, 그 '일'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물 위를 걷고 병을 고치는 겉모습의 기적일까요?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답을 주십니다.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12:39~40)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사흘 밤낮을 물고기 뱃속, 죽음과도 같은 어둠 속에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표적,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 오병이어로 무리를 먹이신 일은 전부 이 요나의 표적, 곧 십자가를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죽어야 할 나사로를 위해 예수님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셨고, 굶주려 죽어야 할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 되셨습니다. 마치 의사가 전염병 환자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그 병실에 들어가 함께 위험을 무릅쓰듯, 예수님은 우리가 빠져야 할 그 죽음의 자리에 대신 들어가셨습니다. 그것이 모든 표적의 진짜 의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막아섰을 때,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16:23) 사람의 일은 화려하게 살아남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핵심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 혹시 이 구절을 읽고 '나도 언젠가 병을 고치고 기적을 일으키게 될까?' 상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실제로 어떤 이단의 교주가 현해탄을 걸어서 건너겠다고 큰소리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도는 그런 것이 전혀 아닙니다.
잘 보십시오. 이 말씀의 주어는 '특별히 믿음 좋은 몇 사람'이 아니라 그냥 '나를 믿는 자'입니다. 모든 믿는 사람이 물 위를 걷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믿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공통된 일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이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비우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부름받은 '더 큰 일'도 바로 그 삶인, 나를 죽이고 이웃을 살리는, 작은 십자가를 매일 지는 삶입니다.
한 알의 밀알을 생각해 보십시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그저 사라지는 것 같지만, 거기서 수십, 수백 배의 열매가 맺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작은 땅에 갇혀 있었고, 십자가 앞에서는 제자들조차 다 도망쳤습니다. 겉으로 보면 실패처럼 보이는 삼 년 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밀알이 땅에 심긴 후, 성령이 오시고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설교 한 번으로 삼천 명이 회심했습니다(행2:41). 얼마 지나지 않아 믿는 남자의 수만 오천 명이 되었고(행4:4), 후에는 유대인 중에서도 믿는 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습니다(행21:20). 지역도 팔레스타인을 넘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예수님이 삼 년 반 동안 하신 일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훨씬 넓은 땅에서 복음을 듣고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더 큰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보다 대단한 능력자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심으신 그 십자가라는 밀알이, 이제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정리해보십시오. 우리는 이제 옛 자아가 죽고, 우리 자신이 장갑이 되었습니다. 그 장갑 속에 그리스도라는 손가락이 들어와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기독교는 자기를 증명하거나 자기 소원을 이루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셨으나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예수님처럼, 우리도 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부터라도 죽으십시오. 오늘부터라도,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하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한복음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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