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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말씀 묵상

다른 길은 없다 - 예수만이 길이라는 고백으로 사는 삶에 대하여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28.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한복음 14:4~7)

어느 날 한 등산객이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지도도 없이 "
대충 저쪽 방향이겠지" 하며 자신의 감각을 믿고 걷다가, 어느새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한참을 내려가 있었습니다. 뒤늦게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당황하여 여기저기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 멀리 등산로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표지판 앞에 섰습니다. 그 표지판은 단 하나의 방향만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두 방향도, 세 방향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 그 순간 그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하나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선언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다른 길을 찾아 헤매온 긴 여정이었습니다. 르네상스는 인간 이성의 부활을 선언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고 했습니다. 산업혁명은 기술과 생산력으로 풍요의 시대를 약속했습니다. 계몽주의는 교육과 이성으로 인간을 해방시키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공산주의는 평등과 정의를 내걸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 꿈들이 어떻게 끝났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하나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
왜 인간이 사유 재산을 독점해야 하는가, 함께 일하고 필요한 만큼 나누어 쓰자'는 출발점은 분명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70여 년간 1억 명이 숙청당해 죽었고, 그 거대한 실험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면서 남긴 것은 평등과 정의가 아니라 가난과 질병과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이들이 나타나 "공산주의를 타파하면 정의와 평화가 흐르는 세상이 된다"고 외칩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이전에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해결하려다 공산주의를 택한 것 아니었습니까? 이데올로기를 바꾼다고 인간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체제가 아닙니다. 인간 자체입니다. 인간의 마음속 죄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체제 아래서도 누군가는 소외당하고 누군가는 군림하게 되어 있습니다.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그 어떤 정교한 이데올로기도 인간을 참된 행복으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르네상스를 꿈꾸며, 다른 길을 찾아 헤맵니다. 그리고 그 길 찾기의 대열 속에 성도들도 함께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기독교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도 결국 여러 종교 중 하나, 즉 하늘에 이르는 여러 길 중 하나의 도(道)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교에는 팔정도가 있고, 유교에는 인의예지가 있고, 기독교에는 예수의 가르침이 있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다른 종교들은 목적지까지의 수단과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 방법대로 수행하고, 이 원리대로 살면, 당신 스스로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그 길을 걸어가는 주체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의 길이신 예수께서 먼저 우리 안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분은 우리 옛 사람의 실체를 폭로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시며, 우리를 하나님께 절대 의존하는 존재로 빚어내십니다. 인간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이신 분이 인간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상황과 환경을 바꾸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성도는 복음을 수단 삼아 주변을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럼에도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어떻게 자신을 변화시켜 가시는지를 경험하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성도는 예수님처럼 세상에 보내진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무엇을 요구하셨을까요? 세상을 멋지게 고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요구하신 것은 단 하나, 순종이었습니다. "내 말대로 내려가서 죽으라. 네가 순종하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하마." 이것이 성부와 성자 사이의 언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언약을 따라 골고다로 걸어가셨습니다. 세상을 정화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권력에 저항하는 운동을 이끌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이 온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성도의 부르심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고치라고 보내진 것이 아닙니다. 이 어둡고 억압적인 세상 속에서, 영원한 나라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보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0장에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19장과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19장에는 부자 청년이 등장합니다.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부했던 그는 맘몬과 하나님 사이에서 결국 맘몬을 택하고 돌아섰습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선한 듯 보이는 이 질문 안에, 부자 청년과 똑같은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것이 결국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에피소드를 이 말씀으로 마무리하십니다. "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리고 곧바로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시작됩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20장 1절은 '
가르(왜냐하면)'로 시작됩니다. 이 비유는 그 말씀의 그림 설명입니다.
이른 아침 여섯 시부터 일한 품꾼, 세 시에 온 품꾼, 그리고 저녁 다섯 시, 일이 끝나기 겨우 한 시간 전에 들어온 품꾼, 해가 지자 주인은 품삯을 나누어 줍니다.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줍니다.

저녁 다섯 시에 온 그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정확히 계산하면 1/12 데나리온을 받아야 맞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한 데나리온 전부를 내밀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말문이 막혔을 것입니다. 자기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주인이 전부를 주었습니다. 그에게 그 한 데나리온은 말 그대로 과분합니다.

반면 이른 아침부터 열두 시간을 일한 품꾼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
한 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이면, 나는 열두 데나리온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에게도 한 데나리온이 주어졌습니다. 그는 따집니다. "어찌하여 저 사람과 나의 품삯이 같습니까?" 그에게는 감사도 없고, 과분함도 없고, 만족도 없습니다. 자기가 주인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그 교만한 마음이 보상 욕구로 드러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천국은 저녁 다섯 시에 와서 한 데나리온을 받고도 과분하다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과분함은 어디에서 옵니까? 십자가에서 옵니다. 2천 년 전 골고다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죽을 짓을 해서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를, 예수께서 품에 안고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 사실이 가슴 깊이 확인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할 수 없게 됩니다.
사업이 망했습니까? 그것이 골고다 십자가보다 더 치욕스러운 자리입니까? 대학에 네 번 떨어졌습니까? 그것이 십자가보다 더 수치스러운 자리입니까? 배우자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은 자에게, 자기보다 못한 배우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모든 상황은 과분한 상황이 됩니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느 자매님이 숨을 거두기 직전에 이런 말을 남기셨습니다. "
목사님, 저의 암은 제 마음의 병을 고치는 약이에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단단한 마음을 고치시려고 암을 약으로 쓰셨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습니다. 그녀에게 암이 낫는 것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지어져 가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 암조차 자신에게 약이 되었다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암도, 가난도, 핍박도, 억압도, 하나님께 쓰이면 약이 됩니다. 이것이 성도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로마의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 중 상당수는 로마 귀족들이었습니다. 넓은 저택과 화려한 연회, 제국의 풍요를 얼마든지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지하 무덤 카타콤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 풍요가 자신들의 신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지하에서, 감격의 찬양이 흘러나왔습니다.

훗날 구소련의 교회도 그러했습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킨 성도들로 가득했습니다. 서구의 교회들은 그들을 걱정하며 공산주의의 몰락을 위해 기도했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습니다. 드디어 공산주의가 무너졌습니다. 자유가 왔습니다. 맥도날드가 들어오고 코카콜라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들이 무너졌습니다. 배를 두드리며 교인들이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핍박이 교회를 지켰는데, 풍요가 교회를 허물었습니다. 무엇이 성도에게 진정 유익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하는 역사입니다.

예수라는 길은 넓고 화려한 길이 아닙니다.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
이미'와 '아직' 사이의 공백은 자기 부인과 십자가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공백을 우리의 계획과 소원으로 채우려 합니다. 더 좋은 환경, 더 높은 자리, 더 나은 조건, 그것들로 그 공백을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경은 성도의 삶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 5: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환난 속에서 오래 참고, 핍박 속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로 행복한 삶,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신앙생활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보화를 이미 받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과분한 마음으로 감사의 삶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아래로 내려가십시오. 예수라는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아무 길도 보이지 않는 적막한 곳에 내던지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
왜 길이 없어?"라고 외칠 것이 아니라, "아,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유일한 길을 걸어 당신께로 오라고 나를 이 벼랑 끝으로 밀어 넣으시는구나" 하고, 예수를 붙들면 됩니다. 그 상황을 반드시 뒤집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역사가 증명했고, 성경이 명확히 밝힙니다. 예수만이 길입니다. 그 과분한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 이 세상 어떤 자리에서도 감사와 찬양으로 하늘 백성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성도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증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