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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말씀 묵상

어떻게 예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 인감도장을 빌려 쓰는 사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한복음 14:23)

어느 목사님이 병원 중환자실 앞 복도에서 한 여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남편이 수술실에 들어간 지 여섯 시간째,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
하나님,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 기도를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 앞에서 그보다 정직한 언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날 밤, 그 목사님은 오래도록 잠들지 못한 채 이런 질문을 안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평생 배워온 기도라는 것이, 정말 이 "살려주세요"라는 한 문장 안에 다 담기는 것일까?

요한복음 14장은 그 질문에 대해 우리가 생각지 못한 대답을 내놓습니다.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이라니, 얼핏 들으면 성도가 예수님을 능가하는 기적을 일으킨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무엇이었는지부터 다시 들여다봐야 합니다.

옛날 어느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아들에게 나라를 물려주기 전에, 먼저 변방 마을에 내려가 백성들과 함께 살아보라 명했습니다. 아들은 초라한 옷을 입고 마을에 들어가, 병든 자를 고치고 굶주린 자에게 떡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지만, 정작 그가 가진 능력의 진짜 의미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저 "
저 사람은 참 신기한 능력을 가졌구나" 하고 감탄할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 아들은 마을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이번에는 왕궁으로 올라가 아버지 곁에 앉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가 마을에서 보여주었던 그 능력, 병 고침과 나눔의 능력이 이제는 마을 하나가 아니라 온 나라, 아니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동시에 흘러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과, 그 이후 성도들에게 일어날 "
더 큰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여 오셔서 하늘의 풍요를 병 고침과 기적과 떡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갈릴리라는 좁은 땅에서, 서른몇 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표적들을 보면서도 정작 그 표적이 가리키는 하늘의 비밀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배부르게 먹은 오천 명은 다음 날 또 떡을 찾아 예수님을 쫓아다녔지, 그 떡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늘의 풍요와 복이 완성되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인들의 마음속에 한꺼번에 부어지게 된 것입니다. 갈릴리 한 지역에서 일어나던 일이, 이제는 전 세계, 전 인류를 향해 일어나는 일이 되었습니다. 범위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
더 큰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일의 성격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인 아브라함, 욥, 다윗, 솔로몬은 하늘의 복을 눈에 보이는 재물과 자손과 권세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재물과 자손과 권세가 사라지면 그들은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억울함을 토로했고, 욥은 잿더미 위에 앉아 신음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림자를 붙들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사도들은 어떠했습니까?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 발에 차꼬가 채워진 채 등에서 피가 흐르는 그 자리에서 한밤중에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행 16:25). 감옥이라는 조건은 요셉이나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왜입니까? 완성된 것을 이미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조건이 그들의 기쁨을 좌우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
더 큰일"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범위로도 크고, 완성도로도 큽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흔히 오해를 합니다. "
더 큰일을 한다"는 말을 들으면, 마치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대단한 업적을 쌓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성도는 그 말씀을 붙들고 "나도 예수님처럼, 아니 예수님보다 더 큰 기적을 일으켜야지" 하며 분투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옵니다. 12절에서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할 때 쓰인 '하다'라는 동사와, 13~14절에서 "내가 시행하리니", "내가 시행하리라"고 할 때 쓰인 동사가 헬라어 원문으로 똑같이 '포이에오'입니다. 즉 12절에서 성도가 "" 그 큰일과, 13~14절에서 예수님이 "시행하실" 그 일은 문법적으로 동일한 동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성도가 하게 될 더 큰일이란, 사실은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성도 안에서 몸소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구일 뿐, 그 일의 주체는 여전히 예수님이십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목수 밑에서 도제로 일하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스승이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연장과 설계도를 청년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청년은 그 연장으로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집을 보고 "
저 청년이 스승보다 더 큰 집을 지었다"고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청년 자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지은 게 아닙니다. 스승님이 남기신 연장과 설계도가 지은 것이고, 저는 그저 그 손에 들려 움직였을 뿐입니다." 더 큰 집이 지어진 것은 청년의 실력이 늘어서가 아니라, 스승이 완성해 놓은 도구가 이제 청년의 손을 통해 비로소 온전히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 승천하신다는 것은 바로 이 도구, 즉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다는 뜻입니다. "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는 구절이 12절 말미에 붙어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더 큰일은 우리의 능력이 커져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성령이 내려오심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큰일과 우리는 어떻게 연결됩니까? 13~14절이 답을 줍니다. "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바로 기도입니다. 더 큰일이 일어나는 통로가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성격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앞서 살핀 대로, 더 큰일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삶이 그러했듯 자기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위한 기도 역시 "살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죽기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2007년, 한국 기독교 부흥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집회가 서울 상암 경기장에서 열렸습니다. 그때 내걸린 표어가 "
하나님 살려주세요"였습니다. 수십만 명이 모여 회개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 마음 자체를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도의 회개, 성도의 기도가 정말 "살려달라"는 방향이어야 할까요?

한 알코올 중독자가 재활원에서 상담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선생님, 저 이제 술 끊게 도와주세요. 제 인생 좀 살려주세요." 상담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건 '살려달라'는 게 아니라 '죽여달라'는 겁니다. 당신 안에 있는 그 옛 습관, 그 옛 자아를 죽여달라고 기도하세요. 그게 죽어야 새 삶이 삽니다." 옳은 지적입니다. 진정한 회복은 옛 자아를 살리는 데서 오지 않고, 옛 자아가 죽는 데서 옵니다.

성도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
하나님, 살려주세요"가 아니라 "하나님, 제 옛 사람을 확실히 죽여주세요"가 더 본질에 가까운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자 하는 기도, 자아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가 감당해야 할 더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3~14절에는 중요한 조건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
무엇이든지"가 아니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입니다. 이 조건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오래된 이야기 하나가 잘 보여줍니다. 미국 뉴저지 케직이라는 곳에 '자비의 부락'이라는 알코올 중독자 재활 시설이 있었습니다. 창설자 윌리엄 로우는 아들과 손자까지 대를 이어 그곳에 살면서 중독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갱생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 가문의 명성은 뉴저지 전역에 퍼져, 사람들은 누구나 그 이름을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부락에 있던 한 중독자가 견디다 못해 몰래 담을 넘어 도망쳤습니다. 그는 가장 가까운 술집으로 달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저는 윌리엄 로우 부락에서 왔는데, 지금 돈이 없으니 윌리엄 로우의 이름으로 술 한 병만 주십시오." 그러자 술집 주인이 되물었습니다. "뭘 원한다고요?" "술이요." "누구의 이름으로?" "윌리엄 로우의 이름으로요." "잠깐만요. 당신이 말하는 그 윌리엄 로우가, 부랑자들을 데려다가 사람 만드는 그 자비의 부락을 세운 분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상하군요. 그분이 평생 하신 일은 당신 같은 사람을 술에서 건져내는 일인데, 지금 당신은 그분의 이름을 대며 저에게 술을 달라고 하는 겁니까?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제 술집 손님이 될 수 없습니다."

윌리엄 로우의 이름으로는 술을 살 수 없습니다. 이름에는 그 이름의 주인이 원하는 것의 방향성이 이미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아무 것이나가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는 삶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조건에는 사실 세 가지 층위가 숨어 있습니다.

첫째, 그 요구는 나의 요구가 아니라 예수님의 요구여야 합니다. 앞의 이야기가 보여준 그대로입니다.

둘째, 예수님과 나 사이에 이름을 빌려 쓸 만한 친밀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흥미로운 사건이 나옵니다. 떠돌아다니며 마술을 팔던 유대인들이 바울과 예수의 이름을 흉내 내어 귀신을 쫓아내려 했습니다. 그러자 귀신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그러고는 그들을 제압하여 두들겨 패고 옷까지 찢어버렸습니다(행 19:13~16).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 이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의 주인과 실제로 친밀한 관계가 있어야만, 그 이름은 힘을 발합니다. 마치 회사의 인감도장을 아무나 찍을 수 없고, 대표이사와 진짜 신뢰 관계에 있는 사람만이 그 도장을 위임받아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셋째, 그 이름을 대는 사람에게는 이름의 주인이 원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결국 내가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분의 뜻에 동참하겠다는 결단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결국 무엇입니까? 13절 후반부가 밝힙니다. "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우리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강해자 랄프 카이퍼 목사의 이야기가 이 진리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력이 몹시 나빠, 다른 사람이 100피트 거리에서 보는 것을 10피트 거리에서도 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평생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그의 마음속에 물으셨다고 합니다. "
카이퍼야, 사람의 가장 큰 덕목이 무엇이라 생각하니?" 그는 즉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번으로 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길 원하니?" "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과 네 시력을 완전히 되찾는 일 중에서 무엇을 택하겠느냐?"

카이퍼 목사는 한참을 대답하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결국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
물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제 시력이 어떠하든 그것과 하나님의 영광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다시 마음속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나의 영광을 위해 네 시력을 그대로 두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니?" 그날 이후 카이퍼 목사는 다시는 자신의 시력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력이 회복되지 않은 것, 그 자체가 그에게는 응답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기도하셨지만,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로 그 기도를 마치셨습니다(마 26:39). 하나님의 뜻은 그 잔을 아들이 마시고 죽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힘들겠지만 나를 위해 죽어라"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탕을 달라고 조르는 아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좋은 부모는 사탕 대신 쓴 치약과 칫솔을 건네줍니다. 당장은 서운하지만, 그것이 진짜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도의 응답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빚어가는 도구,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
더 큰일"과 "기도"는 어떻게 우리 삶에서 실제로 이루어집니까? 여기서 본문의 정교한 구조가 답을 줍니다. 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와 21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는 거의 같은 내용을 앞뒤에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문학에서 이런 구조를 흔히 "샌드위치 기법"이라 부릅니다. 같은 내용의 빵 두 조각 사이에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 곧 핵심 속재료를 끼워 넣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15절과 21절 사이(16~20절)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보혜사, 곧 성령이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 18) 이 구조가 말해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계명을 지키는 것, 더 큰일을 하는 것,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 이 모든 것은 결국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심으로써 이루어지는 하나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낙심합니다. "
나는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나? 계명을 지키고 있나?" 자문해보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딜레마에 놀라운 해법을 제시합니다. 23절에서 예수님은 15절의 "계명"을 "내 말"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곧 예수님 자신임을 밝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렇다면 "내 말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뜻과 같습니다.

그런데 20절을 보십시오. "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은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즉 우리가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력을 쥐어짜서 이루어내는 성과가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 예수님이 친히 이루어 가시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한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다가, 손이 너무 작아 도저히 곡을 완주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뒤에서 자기 손을 아이의 손 위에 포개어 함께 건반을 눌러준 적이 있다고 합니다. 곡이 끝나고 아이가 "
엄마, 저 다 쳤어요!" 하고 기뻐하자, 어머니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네가 쳤어. 그런데 사실은 엄마 손이 네 손을 감싸고 함께 눌러준 거란다." 아이의 손이 진짜로 건반을 눌렀지만, 그 손을 가능하게 한 것은 뒤에서 감싸 쥔 어머니의 손이었습니다.

우리의 계명 지킴, 우리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예레미야 31장이 예언한 새 언약,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렘 31:33) 이미 우리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몫은 무엇입니까? 애써 사랑하려고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이 그 비밀을 알려줍니다.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결혼 생활을 오래 한 부부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하는지 새삼 깨달았을 때,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되더라." 사랑은 논리로 만들어내는 감정이 아니라, 상대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저절로 피어나는 반응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실체가 낱낱이 드러날 때, 오히려 그 순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
이런 나인데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니, 그 사랑이 얼마나 큰가." 그 깨달음이 밀려드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나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못할까?" 자책하며 애쓰지 마십시오. 다만 성경에 풍성히 기록된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배우고, 삶 속에서 경험하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아갈수록, 그 사랑은 자연스럽게 흘러넘쳐 이웃에게로까지 번져갑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더 큰일, 기도, 계명 지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이 성령으로 이미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통해 당신의 일을 완성해 가시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 사랑을 알아가고, 확인하고, 그 사랑에 반응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그것이 이미 다 이루어진 은혜 위에 서 있는 성도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