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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말씀 묵상

하나님의 처소가 된 사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4.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2~3)

어느 시골 마을에 오랫동안 비어 있던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한때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고, 마당에는 꽃이 피어 있었지만, 오랜 세월 주인이 떠난 뒤 집은 점점 허물어져 갔습니다. 창문은 깨지고, 벽에는 곰팡이가 피었으며, 마당은 잡초로 뒤덮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집 앞을 지나며 말했습니다.
"저 집은 이제 끝났어." "헐고 새로 짓는 게 낫겠어." 그런데 어느 날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부자가 그 집을 사들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집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지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그 낡은 집 안으로 직접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집을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깨진 창문을 갈고, 썩은 기둥을 세우고, 무너진 담장을 수리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왜 저런 집에 들어가 살지?" "저 집이 뭐라고 저렇게 정성을 쏟을까?" 그러나 주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집이 지금은 낡고 초라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반드시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도 이와 비슷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완벽하게 만든 다음에 받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깨끗해진 후 들어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와 상처로 가득한 우리 안으로 먼저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으며 천국의 집을 떠올립니다. 물론 그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처소는 단순히 죽은 후 들어갈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거하는 관계, 하나님께서 죄인 안에 거하시는 놀라운 연합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것을 계획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자 사람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성경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집을 되찾아 가시는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성막을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 한가운데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하겠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성막과 성전은 늘 불완전했습니다.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성전은 더럽혀졌고, 결국 무너졌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성전은 여러 번 파괴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성전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 답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의 담을 허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기에 이제 하나님께서 죄인 안에 거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치 오랫동안 폐허가 되었던 집에 주인이 다시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성도는 더 이상 하나님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전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왜 우리는 여전히 부족할까요? 왜 넘어지고 실수하고 죄와 싸울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고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낡은 집을 떠올려 보십시오. 주인이 들어왔다고 해서 하루 만에 집이 새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사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먼지를 털어내야 합니다. 썩은 부분은 뜯어내야 합니다. 때로는 아픈 과정도 필요합니다. 성도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신 후 평생에 걸쳐 우리를 하나님의 집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성화는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공사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여기까지만 손대세요."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나는 이 집 전체를 새롭게 만들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손대시는 곳은 우리의 중심에 앉아 있는 ''라는 우상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화를 내는 이유도 대부분 자기 때문입니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도 그렇고, 교회 갈등도 그렇고, 인간관계의 대부분의 문제는 결국 ''라는 왕이 왕좌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성공을 추구했습니다. 자기를 자랑했습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형제끼리 소송까지 벌였습니다. 겉으로는 교회였지만 삶의 원리는 세상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이 말은 세상 사람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말합니다. "네가 중요하다." "네가 성공해야 한다." "절대로 손해 보지 마라."

그러나 십자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남을 사랑하라." "손해 보는 것 같아도 하나님을 신뢰하라." 이 두 길은 결국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세상과 구별된 삶으로 부르십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평생의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으로 만드시는 과정은 곧 ''라는 왕을 내려오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 공사가 실패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에베소서는 우리를 향해 "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간다"고 말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처소가 되었지만, 동시에 지금도 처소로 지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건물이 완성되어 가듯이 말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 속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깁니다. 고난이 찾아옵니다. 눈물이 납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공사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벽을 허물고 계십니다. 기둥을 세우고 계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집답게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언젠가 모든 공사가 끝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죄도 없고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는 상태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이 아닙니다. 이미 사랑받은 자가 그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처소가 된 자가 그에 걸맞은 모습으로 빚어져 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공사를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도 기꺼이 자신을 내어드리는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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