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1~3)
어떤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인간은 불안을 먹고 산다." 처음에는 과장처럼 들렸지만, 생각할수록 틀린 말이 아닙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는 크고 작은 근심의 목록을 점검합니다. 오늘 해야 할 일,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언제 닥칠지 모를 불행, 어떤 날은 근심이 너무 촘촘하게 엮여 있어서, 그것을 다 걷어내면 남는 게 없을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14:1) 이 말씀은 위로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당혹스럽습니다. 어떻게 근심하지 말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할 수 있습니까? 열아홉 살 딸을 하루 아침에 잃은 아버지에게, 내일 월세를 낼 방도가 없는 사람에게, 시한부 선고를 받고 병실에 누운 이에게, "근심하지 말라"는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너무 가볍고, 어쩌면 잔인한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을 거기서 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근심하지 말라는 권고 뒤에, 주님은 그 유일한 이유를 달아두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은 바로 그 '이유'의 안쪽입니다.
근심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습니다. 성경은 그 기원을 인류의 첫 장면까지 거슬러 올라가 설명합니다. 처음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그들에게는 근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먹을 것이 풍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지실 분이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분을 거부하고 스스로 떠났습니다. 그 순간부터 인간은 홀로 자신을 지켜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미래를 통제해야 했고, 결핍을 채워야 했으며, 죽음을 두려워해야 했습니다. 근심은 그렇게 인간 삶의 기본 조건이 되어버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삶 속에서 동원하는 거의 모든 수단은 이 근심을 잠재우기 위한 것들입니다. 보험을 들고, 저축을 하고, 건강검진을 받고, 좋은 인맥을 쌓는 것, 그것들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것들을 정교하게 쌓아 올려도,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올해 초, 한 교회에 비보가 날아들었습니다. 교인 한 분의 열아홉 살 막내딸이 길을 걷다 넘어졌습니다. 머리를 다쳤는데, 하루 만에 뇌진탕으로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날 저녁까지 멀쩡히 웃고 떠들던 딸이었습니다. 담임 목사는 그 아버지 앞에 섰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위로의 언어도, 어떤 신학적 설명도 그 자리에서는 너무 가볍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근심의 민낯입니다. 그것은 논리로 해소되지 않고, 의지로 쫓아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신 해답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근심의 반대말로 '평온'이나 '안정'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을 제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의아하게 들립니다. 믿음과 근심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 둘은 정확히 같은 자리를 놓고 싸우는 경쟁자들입니다. 근심은 '미래를 내가 통제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자랍니다. 믿음은 '미래를 붙들고 계신 분이 따로 계신다'는 확신에서 자랍니다. 믿음이 커지는 만큼 근심이 설 자리는 줄어듭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면서 그 결과를 이렇게 씁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주목할 것은, 그 결과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면 그 일이 잘 풀릴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 마음과 생각이 지켜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바라보는 내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심에 대한 성경의 처방입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마술처럼 제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내면의 닻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 닻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믿음이 근심을 몰아낸다면, 왜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 근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까? 요한복음 13장 끝자락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장면이 그 실마리를 줍니다. 예수님이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즉각 반응합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열정적입니까? 그러나 주님의 응답은 싸늘했습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를 망신 주기 위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가진 믿음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결단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여주신 믿음의 방향은 정반대였습니다. 믿음은 '주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아주 작아 보이지만, 결과는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죽겠다'는 믿음은, 내가 강할 때만 작동합니다. 내가 두려울 때, 내가 지쳤을 때, 내가 배신당했다고 느낄 때, 그 믿음은 힘을 잃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그는 정말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대제사장의 뜰에서 한 여종의 물음 앞에 무너졌습니다.
반면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믿음은, 내가 약할 때 더 강하게 작동합니다. 그 사랑은 내 상태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흔들려도, 내가 부인해도, 그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 근심을 몰아내는 힘입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십니다. 세 번 부인한 그에게 세 번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이 결국 베드로에게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가 스스로 결단하여 이룬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이끌어 가심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신앙의 출발점은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입니다. 그 자기부인의 자리에서, 비로소 진짜 믿음이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한 가지 오해를 먼저 풀어야 합니다.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완전한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완료형으로 이미 수여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재형으로 계속 쌓아가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씨앗은 이미 심겼지만, 그것이 자라기 위해서는 물과 햇빛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릴 때부터 수영을 배웠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물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물의 부력을 몸으로 익히게 됩니다. 힘을 빼면 물이 나를 띄워준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됩니다. 그때부터 물이 무섭지 않아집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물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두려움보다 깊어진 것입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반복하여 배우고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믿음은 점점 깊어지고 단단해집니다.
그래서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삶의 상황 속에서 붙들 수 있도록 근육을 키우는 일입니다. 성경을 통해 믿음을 굳게 하는 그 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예배당 안에서는 '아멘'을 외쳤다가 문밖을 나서는 순간 다시 근심에 포위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은 이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에서 벗어나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은, 결국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이 세상의 풍요와 안전을 근본적인 목적지로 삼는 한, 근심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결코 완전한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시인 프랜시스 톰슨의 삶은 말 그대로 추락의 연속이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게으름으로 퇴학당했고, 의사가 되려 했으나 시험에 거듭 낙방했습니다. 시인의 꿈을 품고 런던으로 갔지만 노숙자가 되었고, 아편에 깊이 중독되었습니다. 간헐적으로 정신이 들 때마다 그는 쓰레기통에서 주운 펜으로 넝마 쪽지에 시를 썼습니다. 그 쪽지들이 모여 시집이 되었고, 그 안에 한 편의 시가 실렸습니다. '하늘의 사냥개'입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밤과 낮의 비탈길 아래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세월의 아치 저 아래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내 마음의 미로로..." 도망치는 자와 쫓아오는 자입니다. 그런데 쫓아오는 발소리는 급하지 않습니다. 톰슨은 그것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서두르지 않은 추적으로, 침착한 보조로, 계산된 속도로, 위엄 있는 긴박성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도망치는 속도에 맞춰 쫓아오십니다. 놓치지 않으려고 헐떡이며 뛰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가 돌아올 것을 아시는 듯, 위엄 있게 따라오십니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에 그 목소리가 들립니다. "보잘것없는 너를 사랑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나밖에는, 단지 나밖에는 말이다. 내가 네게서 무엇을 빼앗았던 것은 너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네가 내 품에서 그것을 다시 찾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톰슨은 평생 추락했습니다. 그러나 그 추락의 매 순간, 그를 쫓아오는 발소리가 있었습니다. 그가 도망쳤던 모든 골목, 아편으로 흐릿해진 모든 새벽, 넝마 쪽지에 시를 끄적이던 모든 순간이 사실은 하나님이 그를 쓰다듬으려 내미신 손길이었다는 것을, 그는 마침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과 근심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어떤 목적지를 향해 이끌어가는 과정의 일부입니다. 신명기 6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신 뒤 약속하십니다. 그들이 파지 않은 우물, 그들이 심지 않은 포도원, 그들이 건축하지 않은 아름다운 성읍을 주겠다고. 그들의 노력과 수고와는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이 준비하신 땅으로 데려가겠다고. 그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꺼내진 순간, 가나안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자동으로 설정된 존재들입니다. 마치 강한 자석이 철을 불가항력적으로 끌어당기듯, 하나님은 우리를 그 완성의 자리를 향해 이끌고 계십니다. 그 과정에서 광야를 지납니다. 때로는 물이 없고, 때로는 적이 앞을 막습니다. 그러나 그 광야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나는 곳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입니다. 동굴은 끝이 막혀 있습니다. 들어가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터널은 다릅니다. 아무리 길고 어두워도, 반드시 반대편 출구가 있습니다. 잠시 후 밝은 태양 아래로 이어집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근심과 고통이 얼마나 깊고 어둡든, 그것은 터널입니다. 그 터널의 끝을 붙들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을 믿는 것, 그것이 근심을 이기는 유일한 길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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