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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말씀 묵상

종의 자리로 내려가는 삶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라."(요한복음 13:16)

최후의 만찬 자리였습니다. 유월절 전날 밤, 예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셨습니다. 그리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발을 씻기는 일은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가장 낮은 자리의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선생이, 그것도 그들이 '
'라고 부르는 분이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발을 씻기고 계셨습니다. 그 행위를 다 마치신 예수님은 조용히 옷을 입으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요한은 이 장면을 기록하면서 '
'이라는 단어를 복수형으로 씁니다. 사소해 보이는 이 문법적 선택은 사실 깊은 신학적 의도를 품고 있습니다. 그 단어는 훗날 골고다 언덕 위에서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기던 장면에 사용된 바로 그 단어와 동일합니다. 요한은 우리들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입니다. 겉옷을 벗으시고 무릎을 꿇어 종의 일을 하셨던 그 모습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미리 그린 그림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옷을 입으시고 자리에 앉으신 그 모습이 바로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승귀를 미리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종으로서의 삶은 수치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부활과 영광으로 결론지어졌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옷을 입고 앉으신 후,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니 이 말씀은 단순한 윤리적 권면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이 말씀의 논리는 명확합니다. 상전이 무릎을 꿇고 종의 일을 하셨다면, 그 상전의 종들이 그 일을 마다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전이 걸어간 길보다 더 나은 길을 종이 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우리가 살아야 할 발 씻음의 삶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자기 것을 손해 보면서 남을 섬기는 것, 이를 악물고 원수를 용서하는 것, 오지에 단기 선교를 떠나는 것, 물론 그러한 모습들이 발 씻음의 삶 속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발 씻음의 삶에서 '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는' 외적인 모양들입니다. 발 씻음의 삶의 본질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의 발 씻음의 삶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계신 분이 스스로 그 자리를 내려놓으신 것. 자기를 비우신 것, 종의 자리에서 주인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것이 발 씻음의 삶의 본질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
하나님'으로 여기며 삽니다. 자기가 인생의 중심에 앉아 자기라는 우상을 섬기며 삽니다. 따라서 성도의 발 씻음의 삶이란 다름이 아닙니다. 그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부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과연 우리의 결단과 열심으로 그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세상에 보내진 성도의 삶을 묘사하면서 '
향기'라는 단어를 선택합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왜 바울은 '모양'이 아닌 '냄새'라는 단어를 선택했을까요?

모양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꾸밀 수 있고 위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냄새는 다릅니다. 냄새는 그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장미꽃에서 개나리 향이 날 수 없고, 시궁창에서 고급 향수 냄새가 날 수 없습니다. 냄새는 그 존재의 고유한 정체성입니다. 아무리 위장하고 싶어도 냄새는 숨길 수 없습니다. 썩은 시체에 아무리 향기로운 향수를 뿌린들 그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창조될 때, 그 새로운 존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같은 서신에서 성도를 '
편지'라고도 표현합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편지는 스스로 쓰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써서 보내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새겨 주신 삶이 우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명하신 발 씻음의 삶은 사실 도덕적 명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반드시 너희를 그렇게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선언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어떤 삶인지, 사도 바울의 삶이 그 구체적인 답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본래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조국의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눈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제거해야 할 이단이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 갈 때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그는 자기 확신과 자기 열심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발 씻는 종으로 만드시기 위해 개입하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빛이 그를 쓰러뜨렸을 때,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처음으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그의 삶은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얼마나 처참한 고백입니까? 하나님의 일꾼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삶을 나열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세상의 찌꺼기 같은 삶을 본받으라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삶이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방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자신의 지식과 열심이 얼마나 무용한지를 뼈저리게 경험하게 하셨고, 그 과정에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티끌임을 올바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라는 우상이 제거되고, 그 자리에 하나님이 좌정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발 씻음의 삶이었고, 그 삶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바울의 발 씻음의 삶이 도덕적으로 착한 삶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가 부인되어 가는 전 과정에서 일어난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발 씻음의 삶의 의미를 잘 표현한 한 편의 영화가 있습니다. '
워낭소리'라는 작은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경상북도 어느 산골 마을, 여든이 다 된 노인 최원균 할아버지와 마흔 살 먹은 늙은 소의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후 극장에서 일반 개봉을 했습니다. 소의 평균 수명은 15년입니다. 그런데 이 소는 40년을 할아버지 곁에서 살았습니다.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이가 너무 들어 잘 일어서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쇠죽을 한 통 먹이고 "이랴" 하면, 그 늙은 소는 산더미 같은 나무 짐을 척척 져 날랐습니다.

그 소는 여덟 살 때 침을 잘못 맞아 한쪽 다리 근육이 자라지 못했습니다. 평생 불편한 다리로 엉금엉금 걷고 또 걸으며 논을 갈고 밭을 갈았습니다. 등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만큼 일을 했습니다. 할머니는 수시로 그 앙상한 등을 쓸어 내리며
"너하고 나는 팔자가 사나워서 평생 고생만 한다"고 넋두리를 했습니다. 최원균 할아버지 역시 평생 자식 아홉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아온 분이었습니다. 그 소는 할아버지의 또 다른 투영이었습니다. 둘 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주어진 자리에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소는 노쇠하여 마침내 죽어 갑니다. 죽어 가면서도 주인과 헤어지기 싫어 그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할아버지는 소의 코에 끼워진 코뚜레를 낫으로 잘라 줍니다. 그리고 울면서 말합니다.
"죽어서는 좋은 데 가라." 그 장면이 우리의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생뚱맞게도 우리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코에 코뚜레를 끼우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목적지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 길에 우리가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할 때,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시며 저렇게 우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우리 코의 코뚜레를 빼내시면서
"우리 아들, 잘 참아 주었다" 하시며 그 길을 되짚어 보시고 또다시 눈물을 흘리실 것만 같았습니다.
그게 발을 씻는 종의 삶입니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두 가지 전혀 다른 콘텐츠가 동시에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드라마 '
꽃보다 남자'와 바로 이 '워낭소리'였습니다. '꽃보다 남자'에는 외제 스포츠카를 타고 아버지 회사의 전용기로 세계를 누비는 재벌 2세 고교생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워낭소리'에는 평생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노인과 그의 늙은 소가 등장합니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두 작품 모두에 열광했습니다. 왜일까요?

대중이 구준표에게 열광하는 것은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대리만족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워낭소리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 대리만족이 채워지지 않을 때 상대적 위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두 콘텐츠는 대척점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욕망의 두 얼굴입니다. 구준표라는 판타지를 꿈꾸면서, 현실이 따라주지 않으니 남의 불행에서 위로를 찾는 것, 그것은 여전히 '
'라는 우상이 인생의 중심에 앉아 있는 세상 사람의 삶입니다.

'
'가 내 인생의 중심에 앉아 있는 한, 내 옛사람의 썩은 냄새만 진동할 뿐입니다. 아무리 위장해도 냄새는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라는 옛 사람이 제거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좌정하시게 되면, 자연스럽게 풍겨나는 것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무엇을 해서 하나님께 점수를 얻을지 고민하기 전에, 먼저 ''라는 존재가 부인되고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그 향기는 세상에서 두 가지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이 나타날 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봐, 예수 믿고 뭐가 좋아? 저렇게 당하고 살 거면 애초에 안 믿는 게 낫지. 쌤통이다." 그들은 사망을 향해 돌아섭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저렇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저렇게 붙들고 살 수 있다면, 나도 그 믿음을 갖고 싶다." 그들은 생명을 향해 돌아옵니다. 전자가 사망에 이르는 향기요, 후자가 생명에 이르는 향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발을 씻는 삶이 단순히 친절하고 도덕적인 삶이라면, 누가 그 사람을 마다하겠습니까? 당연히 환영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고난을 보면서
"저게 바로 예수 믿는 삶이구나" 하고 그 삶을 영접할 수 있는 것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셔서 마음 판에 그리스도의 편지를 새겨 두신 이들만이, 그 향기를 맡고 생명을 향해 걸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렇게, 종이 된 자들의 삶을 통해 미련하게 전파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붙들고 의지하던 것들을 하나하나 쳐 내고 계십니다. 자존심이 무너지는 경험, 체면이 구겨지는 순간, 재산을 잃는 상실, 건강이 흔들리는 두려움, 가정이 흔들리는 고통, 직장을 잃는 막막함,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우리를 종의 자리로 이끌어 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이외에 의지하고 있던 모든 것들의 허황됨과 무력함을 경험하게 하시며, 그 모든 것에서 하나하나 풀려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당황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찬양하십시오. 사도들은 감옥에서 두들겨 맞고 나오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그렇게 대우하셨다는 것에 기뻐 찬양했습니다. 그게 발을 씻는 종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참았습니다.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었습니다… 근심하는 사람과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과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과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것이 발을 씻는 자의 삶입니다. 상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삶을 본받아 살라고 하셨습니다. 종은 상전보다 크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감수하며, 아니 기대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반드시 이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발을 씻으신 주님이 옷을 입으시고 자리에 앉으셨듯이, 발을 씻는 삶을 살아낸 우리도 결국 그 보좌 앞에 앉게 될 것입니다. 열심히 종의 자리로 내려가십시오. 그것이 오늘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