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한복음 12:32)
어느 늦가을 오후, 한 노인이 병원 복도 끝 벤치에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진단서 한 장이 들려 있었고, 그 종이에는 그가 평생 두려워하던 단어가 적혀 있었습니다. 복도 저편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히 오가고, 링거 줄을 단 환자들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동안, 그 노인만이 마치 시간 밖으로 밀려난 사람처럼 그 자리에 굳어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교회에 다녔습니다. 헌금도 빠지지 않았고 봉사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가 느끼는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그 느낌이 틀린 것일까요?
우리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 세상에서 태어났습니다. 학교에서 우리는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 했고, 직장에서 우리는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했으며,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우리는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많이 헌신하고, 더 신실한 신앙인이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의 문법은 단순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는다. 이기는 자가 살아남는다.'
성경은 이것을 뱀의 원리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 사건 이후 뱀에게 허락하신 먹이는 '흙'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내려진 저주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였습니다. 흙을 먹는 뱀, 흙으로 돌아갈 아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집어삼키는 이 구조가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원리이며, 마귀의 방식입니다. 성경이 모든 죄인을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것, 즉 그들이 이미 마귀에게 먹혀 마귀와 한 몸인 상태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이 마귀의 문법이 교회 안으로도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되 그 이름으로 더 강해지려 하고, 더 많이 소유하려 하고, 더 높아지려 하는 욕망, 그것이 힘의 원리를 신앙의 옷으로 포장한 것입니다. 긍정의 힘, 번영의 신학, 기적을 통한 성공, 이것들은 복음이 아닙니다. 뱀의 속삭임에 종교적 언어를 입힌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이 말씀이 오늘날 번영을 설교하는 강단을 향한 것이 아니라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마귀의 문법에 정반대의 방식으로 맞서셨습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는 것이 마귀의 방식이라면, 하나님은 강하신 분이 약한 자에게 먹히는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 우리와 연합하셨습니다. 내어주심, 이것이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어머니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자녀가 밥상에 앉아서 숟가락질도 제대로 못하며 음식을 흘리고 투정을 부립니다.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화를 내거나 힘으로 제압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수고를 더 들여, 더 잘게 썰고, 더 부드럽게 만들어 아이의 입에 넣어줍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그 원리가 골고다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먹히셨습니다.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 그 살과 피를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병원 복도의 그 노인은 평생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를 이 자리에 내버려 두신 것입니까? 그가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이 질문은 단순히 그 노인만의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사업이 망한 사람, 간절히 매달렸는데 사랑하는 어머니를 암으로 떠나보낸 자녀, 하나님을 붙들었는데 관계가 산산조각 난 사람, 이들 모두가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요한복음 12장 2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헬라어 원어 '타랏소'는 혼란스럽다, 동요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흔들리셨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다음입니다. 주님은 그 동요를 하나님께 털어놓으시되, 자신의 감정이나 고통을 호소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이 구절의 강세는 '나를 이 때를 면하게 해 주십시오'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입니다. 고통은 실재했고 동요도 진짜였지만, 그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에 올려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납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이 아닌, 당신의 방식으로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파라디도미'라는 헬라어 단어가 있습니다. 넘기다, 배반하다, 붙잡히다는 뜻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려" 할 때 이 단어가 쓰였고(막 14:10),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잡힌" 후라는 표현에도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막 1:14). 그리고 로마서 4장 25절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내어줌이 되었다"고 할 때에도 동일한 단어가 쓰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파라디도미'하셨습니다. 아들을 세상에게 넘기셨습니다. 마치 배신처럼 보이는 그 행위가 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손으로 아들을 당신의 뜻대로 이동시키시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야기는 이것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6장에서 마가는 묘한 구조로 이야기를 배열합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는 장면(7~13절) 다음에, 갑자기 세례 요한이 목이 잘려 죽는 이야기가 등장하고(25~29절), 그 직후 파송되었던 제자들이 다시 돌아와 보고하는 장면(30절)으로 이어집니다. 왜 이 자리에 세례 요한의 죽음이 끼어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샌드위치 구조입니다. 제자들의 파송 이야기 한가운데 세례 요한의 죽음을 집어넣음으로써, 마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바로 저렇게, 목이 잘리는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시체를 가져다 장사 지냈을 때, 그 이야기는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목이 잘린 자가 도리어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휩소오'의 역설입니다.
요한복음 12장 32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들리다'로 번역된 '휩소오'는 이중적 의미를 가집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들어 올려지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높이 들어 올려지다.' 사도행전 2장 33절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오른손으로 높이셨다"는 그 단어가 이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들린 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높임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던진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이 가장 높이 올리신 자리였습니다.
한 음악가가 있습니다. 그는 평생 자신의 음악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수많은 오디션에서 떨어졌고, 유명한 무대에 서는 것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조용한 마을 교회에서 매 주일 피아노를 쳤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그는 실패한 음악가였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 어린이들이 자라며 그 음악을 마음에 담았고, 그들 중 누군가는 음악가가 되었으며, 또 누군가는 그 교회의 피아노 소리를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들리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방식으로 들렸습니다. 성도의 삶이 이러한 것입니다. 세상의 눈에 내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하나님 앞에서 들리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사업이 망했습니다. 그 순간 두 가지 반응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내 정성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으셨구나' 하며 더 많은 헌금과 더 긴 기도로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는데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이 망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반응은 하나님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쓰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반응은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아래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둘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슬픔은 진짜입니다. 그 통증은 외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지금 내 마음이 동요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슬픔의 한가운데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최선이었고,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 뜻에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입니다. 그 고백이 쉬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자 함이라"(빌 3:7~8). 바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더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가진 것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한 고백이 있습니다. "그는 흥하고 나는 망하여야 하리라"(요 3:30). 이 고백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너무 쉽게 오해합니다. 사업이 망하고, 병이 걸리고, 가난해지는 것이 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부유하면서도 '이 부유함이 나의 힘이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부유함 속에서 망한 사람입니다. 건강하면서도 '이 건강을 힘 삼아 살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건강함 속에서 망한 사람입니다. 성공했으면서도 '이 성공은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며 그 성공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성공 속에서 망한 사람입니다.
환경과 조건은 우리의 거룩을 완성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가난이든 부요함이든, 병이든 건강이든,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우리를 빚으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병원 복도의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이 손에 쥔 진단서에는 암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가 느낀 것은 하나님에게 버려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느낌이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버려지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이 절규는 연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진짜 버려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실제로 세상에 내어주셨고, 그 아들은 실제로 못 박혔으며,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버려짐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버려지신 분이 살아나셨습니다. 그 살아나심이 버려져야 마땅했던 우리들이 살아날 것임을 보증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버림받은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강하고 완전하고 흠이 없는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철저하게 버림받아 마땅한 자들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조건 위에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불가능하고 추악하여 버려질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 사실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병원 복도의 그 노인이 느낀 버려짐은, 어쩌면 하나님이 그에게 가장 가까이 계신 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본문의 마지막 말씀이 이 모든 것을 정리합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요 12:50). '명령'으로 번역된 '엔톨레'는 율법, 계명, 말씀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라 하면 사랑하고, 용서하라 하면 용서하고, 감싸주라 하면 감싸주는 것. 이것이 영생입니다.
뭔가 특별한 것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병이 나아야 영생이 아닙니다. 사업이 성공해야 하나님의 복이 아닙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는 영생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들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버려지셨으나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그 역설이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지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들어 올리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버림받은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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