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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예수님의 기도와 눈을 뜬 자들의 기도 - 하나님은 어떤 기도를 들으시는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21.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 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한복음 9:26~31)

사람은 눈이 떠지기 전까지는 보지 못합니다. 보지 못할 때는 확신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눈이 떠진 사람은, 더 이상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그 소경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단지 눈만 뜬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눈, 기도를 분별하는 눈, 참 경건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눈을 함께 뜬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 앞에서 그가 내뱉은 말은 놀라울 정도로 신학적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을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이 말은 단순한 개인적 경험의 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도에 대한 신학 선언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하는 말.”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로마서 8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조차 모릅니다. 우리는 간절하지만, 그 간절함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드리시는 기도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뒤섞인 욕망과 두려움과 계산을 걸러 하나님의 뜻으로 바꾸어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그 기도가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말은 오해되기 쉽습니다. 마치 죄를 조금이라도 지은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죄인’은 도덕적으로 흠 많은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기 뜻을 붙잡고 하나님을 수단화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 의를 확인받기 위한 독백이었습니다. 반면, 소경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는 교리를 몰랐고, 율법을 몰랐고, 예수님의 출처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내 눈을 뜨게 하신 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다.” 기도의 응답이 기도자의 정당성을 증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종종 거래로 만듭니다.
“이만큼 했으니, 이 정도면 들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백 일 기도, 천 일 제단, 철야, 금식,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조건이 되는 순간, 기도는 신앙이 아니라 미신이 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조금만 더 참았으면 들어줬을 텐데”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은 아버지가 아니라 관리자입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통해
강청의 힘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렇게 불성실한 재판관도 귀찮아서 들어주는데, 하물며 신실한 하나님이 택한 자의 기도를 외면하시겠느냐.” 문제는 기도의 양이 아니라, 기도의 방향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에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왜 기도 이야기 끝에 믿음 이야기가 나올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참된 믿음은 기도의 내용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순교자들은 외칩니다. “언제까지입니까?”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복수가 아닙니다. 그들의 기도는 죄의 종말,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성도의 기도는 언제나 이곳으로 수렴됩니다. 왜 아직도 세상은 이 모양입니까? 왜 죄는 이렇게 끈질깁니까? 왜 의인은 고통받고 악은 번성합니까?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이 고백으로 나아갑니다.
“주님, 속히 오시옵소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병을 고쳐 달라고,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길을 열어 달라고,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 기도 위에 향연을 덮으십니다. 그 향연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필터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고쳐지지 않고, 열리지 않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버려진 기도는 하나도 없습니다. 바울의 가시처럼, 그 기도는 더 깊은 은혜의 통로로 응답됩니다.

느헤미야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자기 인생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무너져 있는 현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했습니다.
“주여, 언약을 기억하소서.” 그 기도는 그를 더 안전한 자리로 이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난의 현장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하나님 나라가 가장 절실히 필요한 자리였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나라에 나를 정렬시키는 은혜입니다. 눈을 뜬 사람은 더 이상 엉뚱한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제 삶을 통해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그 기도만큼은 하늘에서 반드시 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