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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속으로

눈이 열렸을 때,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는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6. 20.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 그 날에야 네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고, 너희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도 보며 너희가 아랫못의 물도 모으며,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도 하며,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이사야22:8~14)

이사야 22장 8~14절은 고대 예루살렘의 위기 상황을 통해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에게 주는 깊은 영적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면서도 실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을 의지하는 이스라엘의 민낯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민낯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의 눈을 가리고 있던 영적 안개를 걷어내십니다. 우리가
'안전하다',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순간, 하나님은 위기를 통하여 우리의 실상을 보게 하십니다. 성벽이 무너졌고, 적은 문 앞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길은 보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적인 방책을 찾습니다.

눈을 뜨게 되었을 때, 그들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수풀 곳간, 병기 창고를 바라봅니다. 물을 모으고, 성벽을 수리합니다. 가옥을 헐어 성을 보강합니다. 다 자기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눈을 열어주시며 “
나를 보라” 하셨는데, 사람들은 “내가 뭘 해야 하지?”로 반응합니다. 이 모습이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의 모습 아닙니까?

인간은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의도도, 현실도, 방향도 나름대로 명확하게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 22장에서 전혀 다른 진실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벗겨주시기 전까지, 인간은 그 어떤 진실도 보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자기 힘과 자기 만족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22장은 ‘
환상의 골짜기’라 불리는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과 경고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부름받은 도성이었지만,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껍데기였고, 삶은 쾌락과 자기 보존을 위한 도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벗기십니다. 벗겨진 눈이 처음 마주한 현실은 성벽이 무너진 황폐함이었습니다. 무너진 성벽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과 인생의 붕괴를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자신들이 튼튼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종교적 활동도 열심히 하고, 헌신도 했으며, 겉보기에 성실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대적의 침입을 통해 그들은 알게 됩니다. 자신들이 견고하다고 믿었던 그 삶이 얼마나 위태롭고 위선적이었는지를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시작된 건 바로 그 다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눈을 열어주셨을 때, 그들이 향한 곳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병기고를 바라보았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무기, 즉 자신의 방법, 노력, 계획, 인맥, 물질, 수단 등으로 상황을 해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눈은 열렸지만 마음은 여전히 닫혀 있었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채우기 위해 그들은 성 안의 집들을 헐어다가 성벽을 보수했습니다. 어찌 보면 위기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수고를 책망하십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은 그들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쓴 것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닙니다. 그 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술을 마시고 쾌락에 빠지며 “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는 허무주의에 빠졌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회개는 없었습니다. 절박함조차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위기 속에서 조차 자신을 사랑했고, 자기 만족을 최우선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너지도록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세운 성벽이 무너지고, 쌓아온 계획들이 무너지고, 관계와 직장, 건강과 명예가 허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우리가 누구를 바라보느냐가 그 이후의 삶을 결정합니다. 그 시선이 여전히 ‘’에게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회개의 자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회개는 단순한 반성이 아닙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다음엔 잘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진짜 회개는 무너진 자리에서 나의 무기고가 아닌,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나 자신에게 아무런 능력도 자격도 없다는 것을 절절하게 인정하며 그 앞에 엎드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손길 없이는 나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믿음이 참된 회개입니다.

하나님은 셈나라는 교만한 관리를 물리치시고, 아히야김을 세우십니다. 아히야김은 겸손한 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조차도 결국 교만에 빠져 무너집니다. 완전한 겸손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었습니다. 이사야 22장의 절정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누구를 바라봐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우리의 성곽이 무너졌을 때, 우리가 바라봐야 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너진 것을 보고 무기고로 가지 말고, 나를 보아라. 너희의 성벽을 헐고 집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의지하라. 너희의 쾌락이 아니라, 나의 은혜를 구하라.”

눈을 뜨게 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동안 감춰왔던 나의 실체, 헛된 신앙, 이기적인 열심, 그리고 겉만 번지르르한 종교적 외식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릎 꿇게 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것이 바로 은혜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