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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속으로

베노니와 베냐민, 그리고 '예수지옥 김밥천국'의 신앙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6. 14.

"그들이 베델을 떠나 에브랏에 아직 채 이르기 전에, 라헬이 몸을 풀게 되었는데, 고통이 너무 심하였다. 아이를 낳느라고 산고에 시달리는데, 산파가 라헬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셔요. 또 아들을 낳으셨어요." 그러나 산모는 숨을 거두고 있었다. 산모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자기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아이의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이라고 하였다. '내 슬픔의 아들' '오른손의 아들' 또는 '남쪽의 아들'. 라헬이 죽으니, 사람들은 그를 에브랏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가에다가 묻었다. 야곱이 라헬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는데, 오늘날까지도 이 묘비가 라헬의 무덤을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35:16~20)

라헬은 눈부시게 사랑받던 여인이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을 수고했고, 그녀는 아름다움과 사랑의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은 그녀의 삶을 "
불임"이라는 어두운 수식어로 시작합니다. 라헬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상징합니다. 그녀의 태는 닫혀 있었고, 하나님이 열어주셨을 때에야 비로소 요셉과 베냐민이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고통을 수반했습니다.

라헬은 둘째 아들을 낳으면서 숨을 거둡니다. 죽음 직전, 그녀는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
내 슬픔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자기 인생의 고통이 응축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이름을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혹은 ‘남쪽의 아들’)로 바꿉니다. 이는 단지 이름을 바꾸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고통의 이름이 영광의 이름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은, 인간의 슬픔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영광으로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향한 어떤 목사님의 직설적인 풍자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합니다.
"예수지옥, 김밥천국."

이 표현은 충격적이지만, 오늘날 교회 현실을 정곡에 찌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
김밥' 즉, 눈에 보이는 유익과 편리함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 예수는 복을 주고, 위로해 주고, 마음의 평안을 주는 ‘김밥 예수’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시면, 사람들은 그 예수를 지옥같이 느낍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짜 예수를 거부하고, 가짜 예수를 따릅니다. 결국, 그들의 신앙은 ‘예수지옥, 김밥천국’이라는 괴상한 공식에 갇히고 맙니다.

이와 다를 바 없는 무리가 요한복음 6장에도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자, 그들은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6)

예수님은 그들의 김밥적 욕망을 거절하셨고,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예수를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
영생’보다는 ‘지금 당장 배부름’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천국’을 알지도,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라헬은 자신의 고통을 아들의 이름에 새겨 넣었습니다. '
베노니'는 자기 삶의 절망과 좌절을 그대로 담은 이름입니다. 이는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고난과 불행, 무력과 실패를 인생의 마지막 이름처럼 달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야곱의 개입은 하나님 아버지의 선언처럼 들립니다.
"그 이름은 베냐민이다." 슬픔의 아들’이 아닌, ‘오른손의 아들’, 곧 능력과 영광의 자리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선언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
베노니’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베냐민’으로 부르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때때로 산고처럼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저 위로와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옛 자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옛 자아와 전쟁을 벌이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숨 쉬기도 힘든 고난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
예수지옥'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마지막은 ‘
지옥’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하나님은 슬픔의 이름을 하늘의 이름으로 바꾸십니다.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 고난 속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진짜 누구신지, 내가 진짜 누구인지, 이 세상이 얼마나 덧없고 헛된지를 살 속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라헬은 죽었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가에 묻혔습니다. 그녀는 약속의 땅을 다 밟기도 전에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태에서 나온 아들이, 훗날 이스라엘의 왕 사울을 낳고, 바울을 낳고, 그 끝에는 ‘
오른손의 자리’에 앉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이름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이 ‘
베노니’ 같아 보인다 해도,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해 우리를 ‘베냐민’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김밥을 주는 분이 아니라, 당신을 죽이시고 새로 낳으시는 분이십니다. 그 십자가는 지옥이 아니라, 영생의 문입니다.

“내가 알거니와 고난이 현재의 영광과 좋게 비교될 수 없다”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지금 ‘예수지옥’ 같은 길을 걷는 듯하지만, 그 끝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시는 ‘참된 안식’과 ‘영원한 천국’ 입니다. 그 주님을 따르십시오. 김밥이 아닌, 십자가에서 주시는 생명을 받으십시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베노니의 인생’이 아니라 ‘베냐민의 영광’으로 일어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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