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이 베델을 떠나 에브랏에 아직 채 이르기 전에, 라헬이 몸을 풀게 되었는데, 고통이 너무 심하였다. 아이를 낳느라고 산고에 시달리는데, 산파가 라헬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셔요. 또 아들을 낳으셨어요." 그러나 산모는 숨을 거두고 있었다. 산모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자기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아이의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이라고 하였다. '내 슬픔의 아들' '오른손의 아들' 또는 '남쪽의 아들'. 라헬이 죽으니, 사람들은 그를 에브랏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가에다가 묻었다. 야곱이 라헬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는데, 오늘날까지도 이 묘비가 라헬의 무덤을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35:16~20)
라헬은 눈부시게 사랑받던 여인이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을 수고했고, 그녀는 아름다움과 사랑의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은 그녀의 삶을 "불임"이라는 어두운 수식어로 시작합니다. 라헬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상징합니다. 그녀의 태는 닫혀 있었고, 하나님이 열어주셨을 때에야 비로소 요셉과 베냐민이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고통을 수반했습니다.
라헬은 둘째 아들을 낳으면서 숨을 거둡니다. 죽음 직전, 그녀는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내 슬픔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자기 인생의 고통이 응축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이름을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혹은 ‘남쪽의 아들’)로 바꿉니다. 이는 단지 이름을 바꾸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고통의 이름이 영광의 이름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은, 인간의 슬픔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영광으로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향한 어떤 목사님의 직설적인 풍자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합니다. "예수지옥, 김밥천국."
이 표현은 충격적이지만, 오늘날 교회 현실을 정곡에 찌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김밥' 즉, 눈에 보이는 유익과 편리함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 예수는 복을 주고, 위로해 주고, 마음의 평안을 주는 ‘김밥 예수’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시면, 사람들은 그 예수를 지옥같이 느낍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짜 예수를 거부하고, 가짜 예수를 따릅니다. 결국, 그들의 신앙은 ‘예수지옥, 김밥천국’이라는 괴상한 공식에 갇히고 맙니다.
이와 다를 바 없는 무리가 요한복음 6장에도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자, 그들은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6)
예수님은 그들의 김밥적 욕망을 거절하셨고,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예수를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생’보다는 ‘지금 당장 배부름’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천국’을 알지도,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라헬은 자신의 고통을 아들의 이름에 새겨 넣었습니다. '베노니'는 자기 삶의 절망과 좌절을 그대로 담은 이름입니다. 이는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고난과 불행, 무력과 실패를 인생의 마지막 이름처럼 달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야곱의 개입은 하나님 아버지의 선언처럼 들립니다. "그 이름은 베냐민이다." ‘슬픔의 아들’이 아닌, ‘오른손의 아들’, 곧 능력과 영광의 자리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선언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베노니’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베냐민’으로 부르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때때로 산고처럼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저 위로와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옛 자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옛 자아와 전쟁을 벌이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숨 쉬기도 힘든 고난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지옥'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마지막은 ‘지옥’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하나님은 슬픔의 이름을 하늘의 이름으로 바꾸십니다.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 고난 속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진짜 누구신지, 내가 진짜 누구인지, 이 세상이 얼마나 덧없고 헛된지를 살 속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라헬은 죽었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가에 묻혔습니다. 그녀는 약속의 땅을 다 밟기도 전에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태에서 나온 아들이, 훗날 이스라엘의 왕 사울을 낳고, 바울을 낳고, 그 끝에는 ‘오른손의 자리’에 앉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이름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이 ‘베노니’ 같아 보인다 해도,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해 우리를 ‘베냐민’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김밥을 주는 분이 아니라, 당신을 죽이시고 새로 낳으시는 분이십니다. 그 십자가는 지옥이 아니라, 영생의 문입니다.
“내가 알거니와 고난이 현재의 영광과 좋게 비교될 수 없다”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지금 ‘예수지옥’ 같은 길을 걷는 듯하지만, 그 끝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시는 ‘참된 안식’과 ‘영원한 천국’ 입니다. 그 주님을 따르십시오. 김밥이 아닌, 십자가에서 주시는 생명을 받으십시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베노니의 인생’이 아니라 ‘베냐민의 영광’으로 일어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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